하고 싶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거나_ 최최최종
- 쓸 수 없었거나, 쓰고 싶지 않았거나
글. 김민정(그래픽 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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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_ 초안. 디자인은 세상의 변화에 기여하죠. 근데 이거 서체 좀 바꿔주세요. 1시간? _수정.
디자인은 세상에… 팀장님, 어제도 소파에서 주무셨어요? _ 최종.
예상치 못한 곳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디자인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 작은 변화를 위해 디자이너는 생각보다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 모 대학교 인쇄물을 만들 때였다. 전체 교수진이 제작물을 회람한 결과 사소하지만 큰 결함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머리 숱이 너무 적었기 때문. 밤새도록 프로필 사진 속 교수님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심었다. 디자인은 과연 어디까지 섬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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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이 과정 전체를 슬기롭게 디자인하기 위한 노력(인내)과 끝까지 책임진다는 각오(체력)다. 구원 투수가 됐든, 패전 처리 투수가 됐든 디자이너는 경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래야 집으로 돌아가 고양이를 만질 수 있다. 경력이 쌓일수록 디자이너란 직업은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고양이를 돌보는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퐁당 칼럼에 자주 등장하는 고양이 삽화는 그래서 취향이 아니라 일종의 지문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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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더불어 자연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난생 처음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한 끝에 텐트에서 맞이한 아침을 잊을 수가 없다. 예민한 탓에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텐트문을 열고 한참 동안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어디선가 평온하고 맑은 무엇이 나를 채우는 느낌이랄까.
디자인에 대한 강박도 조금은 엷어 졌다. 종이로 된 인쇄물에 대한 집착, 수정, 최종, 최최종, Final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맷집도 늘었다. 고양이에서 자연으로, 자전거 타기에서 하이킹으로 옮아간 관심 덕분에 디자인이며, 콘텐츠와 관계없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늘었다. 모르는 동네를 걷고, 지나가는 할머니와 이야기하고, 동네의 길 고양이들을 눈에 담아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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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디자이너 👉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단행본 북 디자인, 웹 매거진, 인쇄 제작물 등 편집 디자인 작업 외에 '코너 트립'이라는 백패킹 관련 굿즈를 만드는 일을 한다. 👉 도움_ 이미경 에디터
💬 다음 주는 에디터 김선형 님의 칼럼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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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다. 더 난감한 문제는 따로 있다. 콘텐츠의 마지막을 책임지는 디자이너는 그 일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것. 일을 맡긴 사람, 기획한 사람, 진행한 사람, 일을 맡긴 사람의 상사, 그 상사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모두 한 마디 거든다. 그 과정을 겪고 나면 처음엔 분명히 붉은 색이었던 것이 초록이 되고, 네모난 것이 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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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gDang by function fongdang@iwfn.co.kr 서울시 용산구 대사관로 32 02-792-2213 수신거부 Unsubscri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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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디자인과 상관없는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비전문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특별하고 유난한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통 감각’을 조금씩 일깨우고 만들어가는 데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키워 가고 있다. 내가 전부터 매거진, 웹진, 책처럼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작업들을 좋아했던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디지털이건, 종이건 이야기를 디자인하는 작업이 좋다. 아니 애초에 디지털과 종이 인쇄물의 영역을 쉽게 넘나들게 된 것도 이야기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얻게 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디지털 콘텐츠는 매일 발행인 경우가 많아서, 외근이 있을 때도 반드시 노트북을 들고 나간다. 그래서 디지털은 어깨가 좀 아프다는 단점이 있지만. 요즘은 이것도 나만의 디지털 백패킹이라 여기며 걷는다. 얼마 전부터는 백패킹에 필요한 이런저런 가방을 만드는 일도 시작했다. 주문을 받아 새로 만든 가방을 매고 걷고 있으면 이런 삶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것에 체념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다는 기쁨. 흙 길을 한 걸음씩 꾹꾹 밟으며 걸을 때마다 전해지는 이 단단한 감각을 더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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