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좋은 사람, 좋은 어른, ‘존경할만한’이라는 표현을 쓴 기사 타이틀이나 멘트를 읽었을 때 무척 낯뜨거워지며 그런 멘트가 쓰여 있다 싶으면 그 기사는 거의 스킵행이다. 매거진이나 신문의 경우에는 바로 다음 페이지로 넘기고 인터넷은 바로 백페이지 버튼으로 돌아간다. 일단 자기가 자기 입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가면서까지 어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자기가 좋지 않았길래 이렇게까지 반박하고 싶어 하나, 생각이 들어 적어도 나에겐 매력이 없다. 더는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걸 똑같이 받아 적거나 기자 딴에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 건 그만큼 이 사람에 대해 할 말이 없다거나,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고. 오히려 이런 단어들은 아무 맥락 없이 편하게, 만만하게 쓰이기 쉬운 말이니까.
아니, 기사도 건너뛰는 마당에 실제로 자신을 ‘좋은 어른’으로 칭하는 워딩을 실 사운드로 듣고야 말았다. 내가 느낀 첫 마음은 신박함이었다. 실제로 기사 같은 데에서는 그렇게 쓰여 있는 걸 꽤 본 적은 있는데 (분명 나도 쓸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워딩을 썼다에 한표다), 청각적으로 자기 자신을 그런 워딩으로 일컫는 걸 실제 듣는 건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새로웠다. 진심으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는 그 당당함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내 그 신박한 감정은 중딩시절 혼돈의 카오스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을 보여 주기 위한 워딩이 절대 좋은 의미로 쓰일 수 없는 ‘좋은’과 설상가상 그 뒤에 오는 단어가 ‘어른’이라니. ‘어른’은 ‘좋은’보다 훨씬 더 입에 올리기 어려운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이 두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텅 빈 무게감에 말을 잃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예전 퐁당에도 썼는데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면 내가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에게 어른의 정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던 듯하다. 그런 어리숙한 생각을 뒤로하고 더 이상 나는 어른을 꿈꾸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 되지도 못할 뿐더러 그 누군가가 나의 ‘어른’이 돼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떡국 좀 남들보다 많이 먹었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그릇이 커지는 것도 아니기에 어른은 절대 나이로 가늠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일단 그 지점부터 어그러졌다. 자신이 남보다 나이가 많다고 자기 스스로 어른으로 칭하는 것. 정말 어른이라면 자기가 어른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앞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든 존중하는 마인드로 대하는 자세, 그게 먼저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타인의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만으로는 절대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아참,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아는 ‘좋은 어른’은 스스로 ‘으른으른’하지 않는다는 거. 상하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 그저 편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화상 목소리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그런 사람들.
여기서 어른이고 뭐고 그게 뭐가 중한디? 그런 거 보면 요즘 시대 어른도 힘이 들 것 같긴 하다. 꼰대를 피해 ‘좋은 어른’이 되야 한다는 우리시대의 프레임이 ‘그냥 어른’ 여럿 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