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서전 - 타인에게 말걸기
글. 김현예(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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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왔다. 눌러보려 했지만 목구멍이 터질 것 같았다. 끄윽끄윽하는 울음이 터졌다. 딱히 슬픈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잠자리에 누워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길 위의 셰프들> 오사카 편을 보던 중이었다.
노점상을 하는 70대의 노인. 이자카야를 하는 노인의 손마디마디가 굵게 변해있었다. 울음이 터진 것은 그 노인의 회상 장면이었다. 오사카에서도 한참 떨어진 작은 섬에서 자랐다고 했다. 앙다문 입술의 화난 듯해 보이는 노인의 표정이 한순간에 일그러진 것은 ‘6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너무나 컸던 것일까. 팔십을 바라보면 인생의 항로에서 얻은 많은 상처들을 잊고 지워내는 것이 아닌가 했던 내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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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길게 이어진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얼마 전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10여년 전 아버지가 보낸 원고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1938년 생으로 경상북포 순흥면 태장리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가의 장남. 술에 빠져 살던 부친을 피해 기댈 수 있는 것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12살이 채 되기 전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학교를 다니고 싶었고, 공부를 하고 싶었던 장남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생업을 책임져야 했기에 꿈을 포기해야 했다.
전쟁과 군입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자서전은 기사 쓰기를 업으로 하는 내게 일감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길게 늘어지는 문장도 좀 손을 봐야하니 시간이 될 때 한번에 봐드리자고 뒀던 것이 오랜 시간 컴퓨터에 쳐박혀 있던 셈이 되었다.
지난 일년 여의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났다. 나는 삶이 힘들 때마다 아버지를 찾았다. 때로는 살기가 싫다고, 때로는 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지는 것이냐며 날 낳은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힘들었다고. 어머니를 잃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70년 가까이 된 이야기를 이제 잊을 때가 된 것 아니냐고,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로는 내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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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내가 아버지의 연배에 있는 셰프의 이야기에 이제야 자각을 한 것이었다. 인간은 나이와 무관하게 십대든 이십대든 한번 받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심지어 그것이 수십년, 반백년을 지난다 하더라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이 사십대에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나 다 크고 작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임을 배웠다.
나이 사십줄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인 셰프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간 외면하고 있던 아버지의 자서전을 달리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엊그제 아버지에게서 문자 하나가 왔다. 한 지방에서 열린 한시백일장에서 상을 탔다는 이야기였다. 용기를 내 철없는(?)답장을 보냈다. ‘우리 아빠 쵝오! 아빠 사랑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와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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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김현예 👉 중앙일보 기자. <책읽는 CEO>, <위기의 가족> 등 책을 썼으며, 기업관련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 다음 주에는 스피치 라이터 류송아 님의 칼럼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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