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잠깐을 빼고는 정지 궤도 위성처럼 주위를 맴돌며, 드론처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나를 저주했지만, 맡겨 놓은 물건들도 어느 것 하나 돌려주지 않았지만, 사실 나도 그녀처럼 가끔 이런저런 책갈피를 구경하느라 책을 펼치고는 한다. 이런저런 부장품들이 책에서 발견되면 그 시절로 돌아가 이런 저런 일들을 꺼내 보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오늘은 스툴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힘들어서 쉬고 있어.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되는데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지만… 바흐 좋아하니? 클래식을 찾아 듣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나는 지금 브란덴브루크 협주곡을 듣고 있어. 언니가 좋아하는 곡이라 엄마가 가끔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하는데, 엄마와 언니를 따라 엉겁결에 자주 듣다 보니 나도 친숙해지게 된 것 같아. 너도 기회가 되면 들어보라고 테이프를 같이 보낸다.
스무 살 무렵에 읽었던 장정일 작가 소설 책에서는 고색창연한 모닝글로리 엽서가 튀어나왔다. 내가 좋아했던 그녀는 독실한 침례교도였는데, 갑자기 침례교도 남자와 결혼한다고 초대를 해서 어이가 없었다. 그제서야 침례교도의 우주에는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질서가, 나와 상관없이 맹렬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는 그게 종교적인 허들이라고 여겼지만, 그건 당연히 계급적 이물감이었다. 바흐를 연주하는 엄마 같은 건 수평 우주 저편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옆집 케이블 티브이 인입선을 몰래 따서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그러다가 누나들이 옷을 갈아 입을 때면 집 밖으로 쫓겨나야 했으니까. 피아노는커녕 엄마를 들여놓기에도 비좁은 집이라, 각자의 엄마들이 가출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면서 자랐으니까.
그래서 고향을 떠난 뒤에는 소도시 외곽, 들판 한 가운데 커다란 창고를 빌려 생활했다. 대책 없이 넓고, 아무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쌀을 씻어 저녁 밥을 앉혀 놓고 고등어를 굽고 있으면,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고양이들도 있었다. 내가 먹을 만큼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고양이들의 몫으로 내놓고. 고등어를 두고 다툼이 생기 참견도 하고 때로는 멸치를 꺼내 진정시키고.
커다란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커다란 방을 여럿 갖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문을 닫고 나가면 그 뿐인. 내가 아늑해서 찾아오는 사람이나 바깥이 두려워서 머무는 사람들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리라. 모두에게 넉넉하게 싸고 좋은 집.
침례교도의 세계에도 편입되지 못하고, 나의 인생 첫 리바이스 501도 돌려받지 못하고, 돌려 달라는 말을 꺼냈다가 계단에서 떠밀려 하마터면, 하마터면 끝에서 하나 둘 세 번째 여자친구들은 단체로 만나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지만, 참 여러가지 일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무엇보다 속이 좁은 어른이 되었다는 게 좀 안타깝다. 옛 책의 옛날 책갈피를 읽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전에는 마음이 벌판처럼 광활한 대신 거칠고 사나워서 곁에 사람들이 머물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머물지 않으니 결과적으로 속 좁은 어른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걸 나만 몰랐던 것 같다. 그래도 변명을 좀 하자면 캐비넷처럼 속이 좁아서 머물라고 권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상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아무튼 싫다는 건 아닙니다. 마음과 달리 어른들에게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