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얼굴이 노랗게 된 아저씨 한 분이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걸어 들어와 의자에 풀썩 쓰러지듯 앉았다. 핏기라곤 없는 얼굴에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지하철 차량 안에서 쓰러졌다고 했다. 평소 고혈압이 있는데 병원에서 처방해 준 혈압강하제를 먹은 게 잘못된 것 같다며.
역무실 직원들은 환자 상태를 보더니 병원에 가는게 좋겠다고 설득하고는, 119에 전화를 걸어 응급차를 요청했다. 그런데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그 쪽 반응이 영 시원찮은 것 같았다.
“환자 상태가 병원에 가셔야 될 것 같은데요. 빨리 와주십시오. 지금 어디쯤이신가요?”
“강남역쯤입니다. 지금 차가 너무 밀려서 그런데 환자분이 지상으로 오실 수는 없나요.”
“안될 것 같은데요.”
급기야는 119에서 환자를 바꿔달라고 했나 보다. 역무원이 환자분에게 스피커폰을 대주고, 환자분은 당연히 못 가겠다는 대답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미안해하면서… 119 대원에게 역 안으로 들어와 달라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은 역무원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너무한다며 화가 난 모습이었다. 다른 역무원이 열심히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물을 권했지만 환자한테 필요한 건 혈압 회복이지 물이 아니었다.
“갑자기 눈이 잘 안보여요.”
환자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시 울린 무전을 받은 역무원.
“가방이 없다네요.”
그 열차가 확실한가요? 앞뒤로 다른 열차는 없나요?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역무원은 습득물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lost112.go.kr라는 사이트와 사용법을 친절히 알려주고는 한 두 시간 안으로 확인해보라고 했다. 당연히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가방을 못 찾아서이기도 하지만 괴로워하는 환자를 보니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저씨, 눈 안보이는 거 혈압이 떨어져서 그래요. 병원 가셔서 바로 혈압 올리는 수액 맞으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라고 말한 후에 역무실을 빠져나왔다.
내 가방, 환자, 모두 걱정이 됐다.
집에 가면서, 도착해서도 계속 사이트를 확인한다. 1~2분 간격으로 새로 고침. 혹시 ‘가방’이라는 키워드가 잘못된 건가 싶어 ‘백’으로도 입력해 보고, 분실 지역도 서울특별시/경기도를 왔다 갔다 하며 무한 클릭. 하지만 내 가방의 흔적은 없다.
“밥 안 먹어도 되겠니? 걱정돼서 밥 생각도 없지? 엄마는 저녁 안 먹어도 괜찮아.”
노트북으로 회사 일을 하면서 계속 사이트를 확인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저녁을 주문했다. 이런 불효녀… 배달된 음식을 잡수시면서도 엄마는 내 눈치를 살피며 내 걱정만 하셨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소득 없이 지나가 버린 시간.
결국 엄마는 잠이 드시고 나는 허리를 두드려 가며 10시 반까지 계속 일을 했다.
그런데 어째 몇 시간 동안 lost112 사이트 페이지들을 탐독하다 보니 신기한 습득물들이 눈에 띈다. 신용카드 머니클립, 여행용 캐리어, 새로 산 옷이 들어 있는 쇼핑백… 어? 현금이 들어있는 지갑도 있네. 심지어 지폐 개수까지 상세히 적어놓았다. 시골에서 가지고 올라온 김치, 백팩, 명품 가방, 최신 스마트폰까지… (아이폰, 어른폰 아니 갤럭시폰 할 것 없이…)
참으로 요상하다.
이름이 써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이런 걸 안 가져갔네? 세상엔 정말 좋은 사람이 많구나…
그러다가도 금세 다른 마음이 고개를 든다. 아니 근데 허름한 내 에코백은 왜 안 돌려주는 거지? 혹시 내 가방 속의 구찌 머플러만 빼 가고 가방은 버린 게 아닐까? 몇 개 되지도 않는 명품인데 한 번 해보고 잃어버리는구나, 역시 난 명품 쓸 팔자가 아니야 등등…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각. 회사 일은 다 마쳤고, 혹시나 하고 또 lost112에서 내 가방을 찾아본다.
앗! 드디어 내 가방으로 보이는 정보와 사진이 떴다. 9호선 종점인 개화역까지 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처음에 확인했던 역무원이 내 가방을 못보고 지나쳤던 모양이다. 애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의심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설레는 맘으로 엄마가 일어 나시길 기다리고 엄마가 기척을 하시자 마자 가방을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거 봐, 찾을 거라고 했지?”
“네. 다행이에요.”
개화역에 전화를 거니 가방이 절차에 따라 동작역으로 옮겨진단다. 오후에 동작역에 전화해보고 그리로 방문하라는 역무원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니, 문득 어제 그 환자는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졌다. 고속터미널역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물으니 중대병원으로 잘 이송됐다고 했다.
“아 엄마, 그 아저씨 병원으로 잘 갔대요. 내 가방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아저씨도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둘 다 들어 주셨네.”
“그래, 우리 딸 참 착하다.”
그 날 오후, 엄마와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고 혼자 저녁 때 가방을 찾으러 갈 셈이었지만 얼른 가방부터 찾으러 가자는 엄마 말씀에 결국 동작역으로 향했다. 이틀 사이 역무실 방문이 두 번째라 이제는 내부 풍경이 아주 자연스럽다.
“감사합니다.”
“네, 여기에 이름이랑 전화번호 적으시고 싸인하시고 가져가시면 돼요.”
“아유, 고마워요.”
“엄마, 내가 짜증내서 미안해.”
엄마와의 1박 2일 나들이 일정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은 가방 분실 사건. 비록 몇 시간 동안 마음은 졸였지만,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어 다행이었다. 따뜻한 엄마 손을 잡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에겐 아직 정이 남아 있고, 우리나라는 괜찮은 나라라는 것.
마음이 팍팍한 월요일 아침, lost112 사이트에 들어가 그 날 11월 10일의 습득물 목록을 다시 찬찬히 살펴본다. 와~ 컴퓨터와 부품 일체를 두고 내린 사람도 있다. 진짜 정신 없는 사람이네. 그리고 그걸 또 습득해서 올린 사람이 있다.
마음이 다시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