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묘하게 고지식해서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서는 결혼할 상대가 아니라면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못 박으셨었다. 또 내가 연애를 하는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셨는데 덕분에 내게 생긴 기술은 완벽하게 연애를 숨기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능력이었다. 아무튼 이런 가풍 안에서 동생이 집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남편을 집에 소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절이 있었는데 이날을 계기로 동생이 집에 루마니아 아가씨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날. 나는 LGBT를 지지하고 페미니스트라 자부하던 자아가 으깨어지는 경험을 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단단하고 공평하게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외국인이 동생의 배우자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축하보다도 불편한 마음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와우... 내 남동생은 출산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에 아직 날도 잡지 않은 둘 사이에 태어날 조카에 대한 걱정부터 만약 둘이 결혼하게 된다면 어느 한 시절에는 루마니아에 방문해 있겠다는 계획을 들을 때는 표정 관리 실패는 물론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구남친 현 남편은 울그락 붉으락 하는 내가 그저 재미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너무나 다양하게 마주한 불쾌한 감정들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을 극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정한 타인이 되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동생은 그 루마니아분과 결혼까지는 가지 못했다... 나는 동생의 감정과는 별개로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때 내가 내색했던 불편한 감정들이 빚처럼 남아 지금도 그분에게 아쉬운 무언가가 남아 있다. 조금 더 잘해줄 걸, 하는 마음과 한국의 전형적인 시누이적 관계를 탈피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이제 와 해봤자 의미 없는 후회들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으깨어진 열린 마음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더 노력했다. 간혹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낯선 이들 중 깜짝 놀랄만한 고백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어린 시절의 가정사나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부터 성적 취향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한 고백들 앞에 서게 됐을 때 나는 덤덤히, 가만히 상대의 고백을 듣는다. 내게 어떤 피드백을 원해서 하는 말들이 아니었으리란 짐작으로 최선의 다정일지를 고민하면서.
열린 마음 자아를 다시 단련하기 시작한 지 3년 차가 되면서 나는 다시 나의 열린 마음에 자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최근 평택시문화재단과 함께 예술교육실험실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예술교육 실험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지금 쓰기엔 부족하기에- 우리 팀이 만든 예술교육의 명칭은 ZOOM人이다. 평택에 살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과 내국인이 서로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문화 이해와 소통이라는 주제로 구성된 교육이었다.
교육안을 구성하고 수강자를 결정할 때 수강자의 인원수를 내국인 7명 외국인 7명으로 구성했다. 우리 프로그램은 일대일로 짝을 이뤄 해야 하는 작업이 많았기에 이렇게 정했던 것인데 계획과 현실은 달랐다. 첫 수업 시간에 외국인은 모두 출석을 했는데 참석하기로 했던 내국인 6명 중 단 한 명만이 참석을 한 것이다. 수업이 시작하고 조금 늦게 내국인이 한 명 더 왔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급하게 강사진들이 수업에 참석해 머릿수를 맞추었다.
1차시는 연극 놀이, 2차시는 사진 찍기, 3차시 서로를 그리기 4차시 짧은 글쓰기와 소감 나누기로 구성된 교육이었는데 융합 예술교육이라는 목적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교육안을 편성해 정신을 차릴 수도 없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것과는 별개로 참가자가 되어 수업에 참여하니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기술들을 동원해 수업을 따라가랴, 마지막 차시인 내 수업을 걱정하랴, 점점 정신줄이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오는 욕을 마스크 뒤에 숨기고 눈은 웃으며 수업에 집중했다. 사진도 찍고 즐거웠던 것 같은데 문제는 내 짝꿍의 얼굴을 그릴 때 발생했다. 나는 미국인 남성분과 짝이 되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이해하자는 취지로 나는 그가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그림을 그렸다.
사진도 엉망이었고 그림은 더욱 엉망이었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네, 라고 생각하며 나도 그의 얼굴을 그렸는데 아마 그도 내 그림이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얼굴형과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표현하려 했는데 아뿔싸...! 얼굴의 색을 칠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나는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차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리기 편한 재료인 색연필을 선택해 그림을 그렸는데 12색 색연필 중 어느 것도 그의 피부색에 맞는 색이 없었다. 그는 아프리카계 흑인은 아닌 굳이 비교를 하자면 크리스 브라운, 리쪼 정도의 피부색을 가진 친구였다. 까만 색연필로 그의 얼굴을 칠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갈색으로 칠하자니 색연필의 갈색은 나무 몸통을 칠할 때의 갈색이라 피부색으로 적절하지도 않아 보였고 갈색을 사용하기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우왕좌왕 12개 밖에 안 되는 색연필 위에서 갈피를 못 잡는 내 손을 보다가 그리기 시간이 끝나버렸다.
나는 그에게 너 눈이 정말 친절해 보이는데 내가 그 매력을 못 살린 거 같아 미안해, 라고 사과했다. 크로키거나 밑그림 정도의 느낌이 나는 그림을 그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나의 글쓰기 시간이 시작됐다. 5줄 쓰기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수월하게 끝났으나, 나는 이날 처음 만나는 내 안의 불편함과 마주했던 것이다. 또다시.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으나 이런 불편함 또한 그에게 일종의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색이라는 말 대신 살구색을, 유모차라는 말 대신 유아차를. 최대한 주의해서 차별을 내포한 말들을 고쳐 이야기하지만... 나는 아직도 빼꼼인 것이다... 언제쯤 활짝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