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 형이랑 혜연 누나가 놀러 왔다. 1층 사무실을 구경하다가 건너편 벽을 타고 올라간 덩굴 끝, 폭염 아래 핀 꽃이 능소화라고 알려주었다. 밥을 나눠 먹고 화분도 받았다.
능소화가 맞을 거야, 남영 형이 말하는데 내가 어디 두고 온 기억들의 실마리 같고, 먼 타지에서 듣게 된 모국어처럼 생소하면서 반갑다.
오늘 밤은 능소화 덩굴 근처가 밤새도록 환해서 잊었던 기억들, 어긋난 약속들이 날벌레처럼 모여들겠다. 새벽에 물끄러미 화분에 물을 주면서 생각하니, 나는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의약품도 귀한 산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어째 꽃, 풀 하나 옳게 아는 것이 없다. 알에서 태어나 뭇 짐승들과 어깨를 겨루며 자랐는데도, 이름, 냄새조차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엉성하게 이은 지붕 위로 위에 멀쩡하게 떠 있던 달, 발 밑에 환하던 개망초, 질경이, 쐐기풀, 가을이 오고 아무렇게나 아무데나 돼지감자꽃이 피면 또 한 철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 이번에는 그 돈으로, 우리들의 천국 장동건 나이키 양털 점퍼를 사리라.
밀렵꾼 무리를 만나 산길을 안내하면 한 철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밀렵꾼들이 안심할 만한 숙소를 연결하고, 먹이가 떨어진 노루가 자주 내려오는 루트들을 알려주고, 어떨 때는 가죽과 고기를 솜씨 좋게 손질하는 동네 먼 친척 아저씨를 소개하기도 했다. 너무 빨리 목 좋은 곳을 알려주면 일당만 줄어들게 되므로, 적당히 뺑뺑이를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노루들이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의 마을 근처로 내려오는 일이 잦았다. 노루들이 사죽을 못쓰는 머루며, 덩굴들이, 맛 좋은 잡풀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어떤 날은 기차가 지나는 건널목에서 노루를 마주친 적도 있다. 아무도 믿어 주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