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였다. 잠들 준비가 되었다. 누워서 요즘 읽고 있는 레이몬드 커버의 책을 편다. 시집 치고는 너무 두꺼워서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단점은 없다. 특별한 내용도 없다. 낚시를 하거나 친구들과 지붕에 눈 쌓이는 소리를 듣거나, 알코올 중독으로 인생이 망가졌다가 다시 천천히 회복하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베개를 세워서 등에 받치고 책을 읽고 있으면 그녀가 어김없이 물어본다. 약은 먹었어? 이는 닦았어? 약도 먹었고 이도 닦았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삼일 째 머리를 감지 않았다. 하하하.
씻지 않아도 가렵거나 개운치 않다거나 하는 마음이 든 적이 별로 없다.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고, 한참을 걸어 다녀서 땀 범벅이 되어도 땀이 마르기만 하면 그냥 잠들 수 있다. 나의 몇 안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다. 무엇인가를 극복하고, 해내는 것도 재능이지만, 이렇게 무엇인가를 기필코 끝내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런 재능은 왜 아무도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요?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고 침대에 누워서 레이몬드 커버의 책을 절반쯤 읽었는데 그가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해서 깨끗한 셔츠와 바지를 차려 입고, 다시 아내를 만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다행이다. 나는 그 부분에 가름 끈을 넣어 읽던 페이지를 표시하고 책을 덮는다. 그가 조금 덜 괴로웠으면 좋겠다. 좋은 친구들과 잘 지내고, 좋은 문장을 써내려 갈 수 있기를.
아마도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히 아내가 내 머리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겠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해야할 것이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굳이 씻지 않아도 잠들 수 있고
레이몬드 카버의 문장들도 평화롭게 마무리 되었다.
이 정도면 됐어, 이 정도면.
모두들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