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선생이 쓴 <전쟁과 사회>라는 책은 헌책방에서도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 알바를 하고 있던 지숙이에게 부탁해 도서관 폐기 도서 더미에서 찾아냈다. <전쟁과 사회>라는 책에서 저자는 한국 사회의 생리가 여전히 전시 체제에 가깝다고 적었다. 피난 열차처럼 가득가득 들어찬 출퇴근 지하철, 적과 아군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 양상, 사회적 안전망이 없기에 생존을 위한 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한 체제.
대표적인 전쟁 생존자인 나의 아버지는 아직도 영화관에서 총격전이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웅장한 사운드가 전쟁 당시의 기총 소사와 폭발음을 연상시키기 때문. 전쟁, 학살, 가난, IMF를 버텨낸 이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서바이버다. 제일 큰 이력은 생존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헤쳐 나온 생사의 위기와 굶주림,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다. 갑자기? 나에게는 갑자기가 아니지만 갑자기.
산으로 산으로 악착같이 기어오르고 있는 경리단, 해방촌, 후암동, 이태원의 골목들은 실제로 6.25 때 피난민들, 식민지 해방 이후 해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이 정착한 곳이고, 군사 주둔지 주변에 만들어진 상권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터전. 나를 포함한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여전히 생존에 압도된 생태계이기에 행복이니 즐거움은 부차적이고 사치스러운, 낯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