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성복의 남해 금산을 꺼내 읽는데 오늘은 딴 생각만 난다. 친구들이랑 남해 금산 보리암에 놀러 갔던 기억. 굳이 생각이 나지 않아도 되는데. 혼자 간 건 아니고, 친구 상용이와 상용이 애인을 따라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친구가 그냥 같이 갈래? 예의상 물어본 걸 좋다고 따라 나섰다. 오, 좋은데? 남해 금산 보리암이 그렇게 좋다는데!
나는 광부의 아들 상용이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광부의 자식들은 거절을 잘 못하고, 그런 광부의 자식들의 애인들은 나중이 되면 거절 못하는 광부의 자식들에게 치를 떨게 된다.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니다. 내가 냉큼 그들을 따라나선다고 하자 나를 포함해 세 사람 중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사귄 지 석 달이 안되었을 때니까.
딱 마침 상용이의 당시 여자친구는 차가 있었고, 광부의 아들 상용이는 운전을 잘 했다. 운전을 곧잘 해서 나중에 덤프 트럭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곧 거짓말이 된다. 상용이는 청춘을 다 말아먹을 때까지 그림과 사진, 영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단편 영화를 찍느라 전세금을 홀랑 날려 먹고, 전세집에 내가 선물했던 불쌍한 작은 냉장고만 주인을 잃고 떠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상용이가 전세금을 날리기 전이었다. 그래도 니가 앞에 타. 나는 최대한 배려했지만, 여행 내내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고, 숙소도 방 한 개만 잡아서 셋이 사이좋게 잠들었다. 한사코 따로 자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성용이의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좋은 친구를 두었다. 아무튼 그것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남해 금산에 도착해 보리암에 올라 이성복의 탁월한 문장들을 떠올렸지만, 상용이와 그의 여자친구는 산에는 오르는 둥 마는 둥 투닥거렸다. 당시에 나는 아니 이 훌륭한 문학적 성지를 눈 앞에 두고,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로 이렇게 답사를 망치다니!! 하고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뒤늦게나마 상용이와 상용이의 당시 여자친구에게 사과하고 싶다. 그리고 둘이 마침내 긴 연애를 끝내고 헤어질 때 나한테 빌려간 책을 어서 당장 지금 빨리 내놓으라고 그 여자친구를 다그쳤던 것도 미안하다. 아무리 절판된 책이라고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도 배터리가 없다는 핑계로, 내 휴대폰을 빌려가 이별의 통화를
징글징글하게 오래 했다. 그 부분은 빼고, 나머지는 다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