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끝나면 합장을 하고 법화경을 외우듯이, 카버의 시집을 편다. 김춘수도, 셰스토프도 은퇴를 하고, 내 머리맡의 천사는 요즘 레이몬드 카버가 맡았다. 키가 190cm 가까이 되고, 몸무게도 100kg은 넘는, 알코올 중독으로 결혼 생활을 다 말아먹고, 남아 있는 차도 술값으로 팔아먹고, 딸에게는 있는 대로 미움 받고 있는.
그 밖에도 내가 모르는 사실이 더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아요. 어둡고, 축축한 이야기들은 노트에 적어도 잘 타지도 않는다고요. 으으으. 그렇지만 레이몬드 아저씨, 아저씨 책을 똑 같은 걸 두 권이나 샀다니까요. 그렇게 말했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낚시를 하러 가셨다.
근처에 강도 없는데, 어디서 긴수염 메기를 잡아와서는 후라이팬에 살짝 굽고, 소금과 후추, 양파를 볶아서 맥주랑 곁들이길래 컵을 하나 갔다 드렸다. 맛있겠네요. 인수인계를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근무 시간 중에 음주는 원래 안되긴 하는데…
나중에 접시를 치우러 가보니 맥주는 그대로였다. 맥주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 휴대폰은 충전기에 꽂아 두고, 그의 시집을 폈다. 그런데 이 맥주는 또 어디서 난 거지?
사내는 수시로 삽질을 멈추고
삽에 기대어 쉬면서, 생각이
아무데로나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둔다.
억지로 가라앉히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삽을 잡는다.
계속, 그렇다, 계속하는 것이다.
- 레이몬드 카버 <어제, 눈> 가운데
나는 이 부분이 몹시 좋았다. 아저씨한테는 굳이 따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있다가 일과가 끝나고 퇴근할 때 좋은 위스키를 하나 사 가야겠다. 적고 있는데, 갑자기 사무실 초인종이 울렸다. 근처를 지나던 택시 기사 아저씨가 화장실이 급하다며 좀 쓸 수 있겠냐고. 화장실로 안내해드리고, 다시 책상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기사 수정 요청이다. 비용을 정산해야 한다고 독촉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대설경보가 내렸다. 아수라장이다.
오늘 메일링이 늦은 것은 그래서 레이몬드 아저씨의 잘못은 아니다. 택시 기사나, 거래처의 잘못이나 대설경보 때문도 아니다. 얼마든지 그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도 있고, 충분한 근거를 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크리스마스니까요!!
모두들 건강하고 사랑하고 행복한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