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최고 SF 작가의 하나로 인정받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각색을 해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영화 <컨택트>도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원제는 Arrival인데 국내 개봉 제목을 수입사에서 이렇게 바꿔버렸다. 고전이라 할 로버트 저메키스의 SF <콘택트>가 이미 있는데, ‘콘’만 ‘컨’으로 바꿔서 검색할 때마다 혼돈이다. 이유도, 근본도 없는 번역 제목이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는데, 거대한 우주선을 곳곳에 세워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지구인은 과학자와 군인들을 우주선 안에 들여보내 ‘접촉’을 하려 한다. 언어학자인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분석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외계인의 언어는 독특하다. 외계인이 문장을 쓰는 방식은, 문어가 먹물을 뿜듯이 한꺼번에 원으로 쓴다. 주어, 술어, 목적어로 이루어지며 순차적으로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하나의 문장이 동시에 발화된다.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가 이유와 원인을 통해서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으며 그것을 동시에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외계인과 물리적으로 접촉한 루이스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도저히 겪고 싶지 않은 비극도 있다.
<컨택트>는 운명에 대해 질문한다. 당신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면,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비극적인 미래가 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테드 창도, 드니 빌뇌브도 예정된 미래를 받아들일 것이라 답한다. 비극이 도래한다 해도, 인간의 인생 모두가 비극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 과정 속의 기쁨과 행복, 성취감 같은 것들도 대단히 중요하다. 사소한 모든 것이 더해져 하나의 인생이 된다.
3차원에 속한 나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시간은 편재한다는 말을 받아들이지만, 결정되어 있는 미래에 대해서는 반 정도 믿는다. 어쩌면 멀티버스처럼, 내 선택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는 우주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유한한 존재인 나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좋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을 테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하면 된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뿐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편하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이미 그러고 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라는 마음이 늘 있다.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성공 여부에 마음 졸이지 않고 즐겁게 시도하고 뒹굴어보자는 마음으로 더 가버린다. 이미 정해진 미래가, 나보다 뛰어난 어떤 존재가 준비해둔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다. 그에게 다 생각이 있을 테니까.
사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정해져 있건, 아니건 모른다. 그저 지금 내가 좋은 것을 하면 된다. 멀리 도망치지 않고, 지나치게 게으르지 않고, 가능한만큼 주변을 살피고 돌봐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