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애는 정말 애송이라서 매사에 걱정이 많고 낯짝이 두껍지 못한 게 흠이었다. 그래도 자기의 걱정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정리하는 방법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1-1)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고 이제는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2) 하지만 평소의 내가 하지 않을 만한 일은 아직 하나도 해보지 않았다. 1-3)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원래대로라면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해야 한다.
2-1) 나는 내가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2) 이것을 증명하려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봐야 한다. 2-3) 만약 거기서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이 친구는 고민 끝에, 도주가 정답이라는 결론을 냈다.
통장을 헐어서 도피 자금을 마련했다. 어쩐지 액수가 빠듯하고 아쉬운 것도 같아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압쁘아아, 하고 무작정 우니까 아빠가 돈을 줬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를 좀 어떻게 해달라, 나는 이제부터 도망을 갈 것이니 돈을 내놓아라 생떼를 쓰는 일은 한국의 장녀로 자란 내게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던 일이라 무척 죄송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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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 어리석고 걱정 많은 애송이에게 감사하다. 그때 저 애가 나름대로 인생을 건 고민을 하고, 끝내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되어보기를 선택해 줘서. 저 애가 있어준 덕분에 인간이 먹고사는 일에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걸 알게도 됐다. 삼백 불 남짓한 주급, 매트리스 한 장, 침낭 두 개, 캐리어 한 개 분량의 세간으로도 나는 망하지 않았고 나날은 평온히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