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까지 나는 카시오 시계를 주구장창 차고 다녔다. 중학생 때에는 돌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카시오를 손목에서 풀어놓는 법이 없었다. 잠들 때도 시계를 풀지 않고, 샤워를 할 때도 웬만하면 손목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카시오 패티시라고 해도 되겠다.
카시오를 차고 있으면 내가 지금 정해진 대로, 순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안도감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무엇에도 변질되지 않는, 오차 없는 무엇인가가 24시간, 나를 보조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그는 잘 망가지지도 어긋나지도 않는다.
게다가 카시오는 오사마 빈 라덴의 손목 위에서는 극악무도한 폭탄의 타이머가 되었다가, 손석희 아저씨의 손목에서는 겸양과 소탈함의 증표가 된다. 카시오는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남들에게 어떤 풍경을 비추는지 드러내는 정체성 증폭기 같은 속성을 갖고 있다. 이제서야 이것이 카시오의 고도화된 마케팅 전략이라는 걸 알겠다. 그런 거였구나.
나는 요즘 다시 카시오를 차고 다닌다. 그런데 내가 카시오를 찼다고 해서 아, 참 검소하십니다, 칭찬하는 사람도 없고, 신분증 좀 봅시다, 하고 다짜고짜 검문하는 사람도 없어서 조금 아쉽다. 나의 카시오가 알려주는 사실은 내가 아주 평범하고 안온한 풍경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사실 뿐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창. 어떤 사람은 바다로 창을 내서 종일 파도 소리가 들리고, 어떤 사람은 캄캄한 골목으로 창을 내서 가로등 밑에만 겨우 겨우 알아볼 수 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남들이 보는 내 창문에는 그냥 버스가 다니고, 가게들은 습관처럼 문을 열고, 주말에는 세탁기가 돌아가고, 나른한 일상들이 지나가는 모양이다.
왠지 억울하다. 이렇게 밋밋한 삶이라니. 이렇게 된 김에 나도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브레이크 타임을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쉬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