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고도 몇 번이나, L의 자취방으로 가는 내내, 기이하게도 나는 하이빔을 켠 미친 자들을 만났다. 그때마다 비상등 버튼을 눌렀고 그러면 그들은 뭔가를 알아들었다는 듯 차선을 바꾸어 가버렸는데 나는, 상대와 내가 나눈 비언어적 대화의 전말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털끝 하나 다친 데 없이 귀가했다. 나는 L의 집 앞에 도착해 잠든 그녀를 깨우며 의기양양했다. 오늘의 성공을 축하하고, 또 기분 좋게 그녀를 배웅하고도 싶어 굳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자동차에,
안개등만 들어와 있었다. 그 꼬락서니로 244km를 운전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미친, 교양 있는 운전자 분들께서는 내가 L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경고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살해하는 일에 실패한 건 운전을 잘해서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운전자들이 우주의 기운을 모아 우리를 보호해 줬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고… 나는 속으로 그녀가 제발 이 사실을 눈치채지 않았기를 빌면서 허둥지둥 그녀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이걸 여태껏 비밀로 간직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날 제 일신상에 무슨 변고가 들이닥칠 뻔했는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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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이 선물한 가습기 외에 다른 하나는 내가 구매한 것이다. 가습기 유지 보수 담당을 맡은 것이 남편인데 어느 날 저이가 하는 양을 가만 보니 매일 가습기에 새 물을 채워주고 있는 거라. 그게 너무 번다해 보여 기존 것보다 네 배 큰 용량을 골라 주문했다. 뜻밖에 남편은 새로운 가습기를 몇 번인가 사용해 보고는 L이 선물한 물건으로 돌아가버렸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가습기에 담긴 물은 용량과 상관없이 매일 갈아줘야 하는 게 맞고, 새로 산 것은 물통이 본체와 분리되는 방식이라 청소하기에 편리한 부분도 있기는 하나 이전 것에 비해 이음매나 돌출부가 많아서 틈새에 낀 물때를 깨끗하게 닦아내기는 더 어렵다고 했다. 자고로 어떤 업무든지 실무 영역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일들에 관해서는 담당자의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옳은 것이어서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이 나았겠으나, 그래도 남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매번 물 채우기 귀찮지 않아?
나는 유지 보수를 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 남편은 말했고 나는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세상에 유지 보수와 적성이라는 단어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고 그게 적성에 맞는 사람과 내가 같이 살면 행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어서다. 어찌 되었든 실무자께서 본인의 맡은 바 소임에 만족하고 있다고 하여, L과의 우정의 증거를 처분하는 대신 케케묵은 비밀 하나와 담당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습기를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청소를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