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이다. 번역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들어왔다.
‘국경’은 군마현과 니가타현의 경계를 말한다. ‘현’은 한국의 ‘도’와 비슷하기에,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현과 현의 경계를 ‘국경’ 즉 나라의 경계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봉건제도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봉건제 국가이지만 지방 영주가 아니라 왕이 모든 영토를 다스리는 중앙집권주의였다. 지방 호족 정도는 있지만, 핵심적인 관리들도 대부분 중앙에서 내려보냈다. 일본은 다르다. 천황도 있고, 쇼군도 있지만, 지방의 영주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왕’이었다. 쇼군의 힘에 굴복하여 충성을 바치는, 작은 왕.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살던 시대는 봉건제가 무너지고 다시 천황이 중심에 서고, 민주적인 정부를 세운 근대 국가였다. 하지만 권위적인 군부가 국가의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폭력적인 시대의 구체적인 서술을 거부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다른 나라로 떠난다. 눈으로 모든 것이 가려진 나라, 에치고유자와. 그곳이 ‘설국’이다.
니가타현의 온천마을 에치고유자와를 가자고 생각한 이유는, 오로지 가와바타 야스나리 때문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 시절의 작가라면 사카구치 안고를 제일 좋아한다. 그럼에도 <설국>의 첫 문장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을 만나는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하다. 늘 설국의 풍경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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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연작소설로 구성된 <설국>의 첫 단편 <저녁 풍경의 거울>이 발표된 것은 1935년이다. 이후 1948년에 완결판 <설국>을 발행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세상을 뜨기 직전인 1971년에 <정본설국>을 완성했다. 가와바타가 처음 에치고유자와에 간 것은 1934년이다. 가와바타는 ‘타카한’이라는 료칸에 묵었고, <설국>의 주인공 여성의 모델이 되는 게이샤 마쓰에를 만났다. 이후 가와바타는 몇 년에 걸쳐 에치고유자와를 찾았고, 그때마다 타카한에 묵으며 마쓰에를 만났다고 한다. 가와바타도, 이후 게이샤를 그만두고 결혼을 한 마쓰에도, 두 사람의 사이는 직접적인 연애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쌀과 술이 맛있다는 니가타현을 가려고 했을 때, 목적지는 일단 에치고유자와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글을 썼던 다카한 료칸이 아직 운영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곳에 묵기로 결정했다. 과거의 료칸은 이미 헐고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지만, 가와바타가 묵었던 ‘카스미의 방’은 당시의 가구 등을 그대로 보존하여 기념관으로 만들어뒀다. 1층에서는 매일 밤 8시에 영화 <설국>(1957)을 상영한다. 타카한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계획은 어긋나기 마련이다.
빌어먹을 기후위기 때문에, ‘설국’을 보지 못했다. 다카한에 묵으면서 카스미의 방을 보고, 해설사의 설명도 들었고, 가와바타가 마쓰에와 함께 갔던 신사에도 갔지만, 기온이 높아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예년 같으면 이미 눈이 내리고, 스키 시즌이 시작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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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 어긋났어도, 아름다웠다.
눈은 없었지만, 일본의 스키 발상지였다는 에치고유자와에는 산이 있고, 온천이 있고, 맑은 공기가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에치고유자와는 다른 나라였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극심해지던 시기의 일본이 아니라 한량들이 낮에는 스키를 타고, 밤에는 술을 마시며 온천욕을 하는 ‘설국’. 게이샤들과 한때의 연애를 즐기는 다른 세계. 세상의 모든 일은 헛수고이고, 세상의 거울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 가와바타는 매료되었을 것이다. 여인에게, 혹은 다른 나라에.
‘카스미의 방’ 책상에 앉아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글을 쓰는 모습을 생각하며 사진을 찍었다. 셀카를 거의 찍지 않는 나로서는 드문 일이지만, 꼭 한 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눈으로 덮인 설국은 보지 못했지만, 다른 세계를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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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봉석 [씨네21] [브뤼트] [에이코믹스] 등의 매체를 만들었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대중문화평론가, 작가로 활동하며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란마귀』, 『좀비사전』, 『탐정사전』, 『나도 글 좀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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