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잠을 못 자면 예민해지니까요. 맞는 말이다. 요즘 좀 잠이 안 와요. 수•면•장•애, 그 외에 또 힘들거나 불편한 점이 있나요?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세요? 아내 분이 방문을 권유하시게 된 이유는 뭘 까요? 증상이 나타난 건 언제부터일까요?
내가 읍사무소에 기대했던 질문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해야 하나요? 저는 그냥 폐기물 스티커를 받으러 온 건데요. 네 되도록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시면 금방 발급해드릴 거에요.
일단 성실하게 대답하기로 한다. 저는 사람들과 별 문제없이 지내는 것 같아요. 아닌가. 아내와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다만? 네, 다만 그저께 좀 다퉜어요. 김치냉장고 때문에요. 이십 년도 더 된 김치냉장고, 이제 좀 버리자고 그래서요. 낡고 냄새나는 김치냉장고를 굳이 계속 갖고 계시려는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자꾸 잠이 오고요. 손도 까딱하기 싫고 그렇네요. 아까는 잠이 안 온다면서요. 네 밤에 잠을 설치니까 낮에 자꾸 졸려요. 머리도 아파요. 무기력하고. 무•기•력. 솔직히 말하면 저는 아직도 김치냉장고가 좋아요. 무슨 예술 작품보다 대량생산되어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제품이라서요. 거기에 더 마음이 끌리네요.
그럴 수 있죠. 계속 말씀해 보세요. 오리지널리티라는 게 희소성과 관련돼 있는 거라면, 오히려 대량 생산되어서 살아남은 것들이 더 오리지널리티에 가까운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시공간의 압력을 견뎌내고 뒤틀리면서 생겨난 원본. 비좁은 자아에 의탁한 예술 따위가 아닌, 시대의 감각을 담고 있는 희소성 높은 원본.
이를 테면 김치냉장고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맞아요. 네!
한 마디로 김치냉장고를 앞으로도 더 소장하고 싶다는 말씀이군요. 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상담은 여기까지 하면 될 것 같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 달 뒤에 다시 뵐게요. 이렇게 해서 한 달 뒤로 김치냉장고 처리가 미뤄졌다. 안심이다.
어둑어둑한 읍사무소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믿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해서 나는 스티커를 발급받지 못했다.
아니 사실 김치냉장고는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다구. 아니 스티커를 붙인다고 해서 김치냉장고가 가벼워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잖아요? 내가 무기력한 게 아니라구! 치우라고 말하기는 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