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을 돌고 나면 어김없이 반성문을 썼는데, 정말 진심으로 반성문을 쓰지 않으면 다시 운동장을 돌아야 했기에 사력을 다하다 보니 나날이 글쓰기 실력이 늘어서 졸업할 무렵에는 아주 문장이 탁월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소년이 자라서 내가 되었는데,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런 문장을 보여주면 그게 이빨이 들어가겠나니요?
언젠가 오래도록 함께 고생해서 뭐랄까 전우 같은? 광고주가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는데, 나도 모르게 운동장을 돌리면 된다고 말할 뻔했다. 하.하.하. 나는 여전히 어설픈 텍스트를 보면 운동장을 돌리고 싶다. 운동장을 돌리면 사력을 다한, 스스로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글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체력도 좋아지니 이만한 솔루션이 없어요 사실.
그래서 '풀꽃'을 나의 피지컬한 세계의 언어로 번역하면 ‘한참 봐야 사람 겨우 같은 놈’ 정도가 될 것 같다. 한참 봐야 겨우 사람 같은 놈, 연민과 애정, 환멸이 동시에 담겨 있는 이 뛰어난 문장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것이 아니고, 김선영 배우가 어느 드라마에서 나를 돌아보면서 한 말이다.
나는 아마도 경계에 있는 문장들을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랑과 환멸이 교차하는,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봉합할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화해할 수 없지만, 공존할 수밖에 없는. 불안을 연료로, 경계에 있으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슬픔과 기쁨이, 환멸과 애정이 서로를 희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쁘다고 슬픔이 줄지는 않고, 환멸난다고 애정이 묽어지는 법은 없다. 뒤섞여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도, 감정의 수위가 낮아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 괴로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원래는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한참봐야 겨우 사람 같다는 문장들처럼 다만 세상에는 참 말하는 법이 여러가지라고, 저마다의 다름을 인정하는 쿨하고, 어른스러운 글을 쓰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굳이 확인하게 만든다는 것도 글쓰기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이 나온 김에 다름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나는 사실 별로 내키지 않는다. 다르니까 인정을 해 달라는 요구와 만날 때마다, 그 다름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르고, 용기를 내 앞장 서거나, 자기 바닥을 확인하는 인정 투쟁에 참전해야 한다고. 내가 아는 다름은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흉내라도 낸 끝에, 끝내 다를 수밖에 없는 지점을 뼈아프게 확인하는 과정에 가까웠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다름 어쩌고 그런 이야기하지 마세요. 적절한 대화 상대가 아닙니다. 운동장을 스무 바퀴 쯤 돌고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든지. 다들 왜 그렇게 다르고 싶어하는지, 욕망하는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그걸 너무나 헐값에 손쉽게, 마치 태어나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놀랍고, 그런 사람들을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될 때마다,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어이가 없네? 알기 쉽게 설명해볼까? 다름을 가지려면 양도세를 300% 정도 내야 한다. 5년 이상 버티면 양도세 세율이 3% 정도로 줄어들고. 이를테면 다름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경험 상 틀림이 아닌 다름을, 부끄러움도 부채감도 없이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다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다름만을 예외적으로 대우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이 지금 외교관 면책 특권 비슷한 걸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는. 물론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만.
풀꽃이라는 시가 결정적으로 맘에 안드는 부분이 뭐냐면, 아니 한참 들여다보는, 자세히 꼼꼼하게 들여다 봐주는 스스로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내야지, 한참 봐야 겨우 사람같은 그 놈이 뭐가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것이냐? 연진아 나는 도통 모르겠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연진아.
그러나 아무튼 원래 이런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