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심한 배려가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오는구나. 머리 검은 짐승은 잘 해줄 필요가 없어. 모르는 여자와 연애에 빠져서 정신이 나갔구나. 호일아, 훗날 너는 나연씨한테 학비, 생활비, 주거 공간을 모두 기꺼이 탈탈 털리는 라이프타임 호구 파트너를 자처하게 될 거야. 그런데도 그녀가 친구들에게 너를 그냥 '친구’, 또는 '아는 사람' 정도로 소개하는 장면을 목격하기 전에, 영주권을 얻자마자 너를 떠나겠다고 말하기 전에, 손절하고 그냥 나랑 게임이나 하면서 지냈으면 좋았을까?
훗날의 불행을 오늘의 행복으로 벌충하면서 호일이는 연애에 열심하느라 나와 소원해졌다. 야간 게임이 금지된 이후, 숨죽여 게임을 해야 할 때 나는 보험용으로 워드 문서 창을 함께 띄워 놓았다. 그 문서에는 내가 새로 쓴 대서사시와 격렬하면서도 유려한 문장들이, 폰트도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이 내가 문장을 만들기 시작한 이상, 이제부터 나는 은평구 계관시인이다, 내가 쓰는 문장은 훈민정음 이후 가장 중요한 기록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화면을 노려보고 있으면 호일이도 별 말을 못하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시를 쓰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많은 문학이 이런 사회적 배려와 도움을 땔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유교 문화 컨센서스가 기본 탑재된 한국에서 글쓰기에 연루된 사람은 쉽게 과대 평가되고, 이유 없는 관용의 대상이 된다.
사실 거품을 빼고 생각하면, 글쓰기의 속성은 정신적인 수행 따위가 아니라, 요리나 제빵, 목공 같은 ‘크래프트(Craft)’한 작업에 가깝다. 차이가 있다면 문장을 만드는 사람들이 제작 과정에 있어 지나치게 유난을 떤다는 점 정도? 엄살도 심해지고, 자아도 비대해지고, 뭘 믿고 눈치도 안 챙기고, 일상적 관계의 압력에 남들보다 예민하다는 둥, ‘내적 망명’이라는 둥 변명만 풍성해진다.
직업적 글쓰기로부터 출발하는 에디터들이 그래서 위험하다. 글 쓰는 자아에 경도되기 쉬운 업무 환경이기 때문이다. 에디터는 사실 크리에이티브와 매뉴얼의 경계에 서 있는, 쉽지 않은 직업이다. 다양한 이해 관계를 조율하고, 에고 트립(ego trip) 삼아 한가한 콘텐츠 놀이를 하는 자들을 색출해서 추궁하고, 뛰어난 재능이 어줍지 않은 아트웍(Art Work) 따위로 물러설 수 없도록, 퇴로를 불살라 텐센 높은 협업 테이블에 앉혀야 한다.
눈에 띄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에디터라는 업(業)을 그저 자아를 빌드업(라임 보소!)하는 데 낭비하는 에디터들을 만날 때마다 속이 터진다. 미어진다. 물론 나도 잘 안다. 허름한 자아를 세탁하는 방법으로 K-글쓰기 만한 것이 없죠. 없는데요, 하지만 에디터는 딸린 식구가 많은 소녀 가장처럼 자아를 돌볼 여력이 없어야 정상이 아닐까? 요? 그래서인지 경험 상 K-장녀들이 이상하케 에디터를 잘 수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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