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샤바 샤바 하이샤바 기운세고 돈도 많은 배트맨. 그렇다. 배트맨은 절망하면서 캄캄한 우물 속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그곳에서 어둠을 물리치는 다크 히어로로 다시 태어나 자신의 절망을, 정의로운 사적 제재의 형태로 승화했다. 명분도 얻고 보람도 얻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나는 망토도 없고, 차도 없고, 완력도, 오너십과 우호 지분도 갖추지 못했지만 배트맨과 같은 캄캄한 우물은 하나 가지고 있다. 나도 배트맨처럼 그곳에 내려가 나를 만나는 날이 꽤 된다. 아버지가 거친 말을 뱉거나 신체적으로 위협할 때, 혹은 그와 비슷한 무기력한 상황에 처할 때면 나는 다시 무작정 그 우물로 내려간다.
배트맨이 우물 아래 지하 동굴을 각종 첨단 무기와 코스튬으로 채워 놓았듯이, 나의 우물도 정다운 계몽사 아동 문고에서 시작해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이며, 직접 깎고 이어 붙여서 만든 목재 모형들로 빼곡했다.
무엇보다 그 우물을 한참 내려가면 내가 사랑하는 서강 기슭이 나온다. 저녁 무렵 강가에 나가 바람에 몸을 식히는 중이었다. 그날도 엄마의 남편과 나 사이에 일촉즉발의 순간이 있었던 모양. 멍하니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는, 알에서 태어났다! 배트맨이 박쥐를 보고 영감을 얻었던 것처럼 무슨 계시처럼 불현듯 마음 속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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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에서 태어났다. 알에서 태어나 볕에 그을리고 바람에 긁히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도무지 아버지가 왜 그렇게 위협적인지 이해할 수가 없으므로, 나는 그냥 그것이 비, 바람, 뙤약볕이나 홍수 같은 자연 현상의 일부라고 믿기로 했다. 나의 난생(卵生) 스토리는 헤세의 데미안처럼 새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벙커였다.
지금 생각하면 마초 그 자체였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연민했던 것 같다. 전쟁, 가난, 동생의 죽음, 남은 형제들에 대한 책임감. 생명처럼 여겼던 평판.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마초의 본질은 시혜적인 태도나 남자다움이 아니라, 지독한, 끝 모를 자기연민이다.
가엾게도 아버지의 가장 큰 불행은 이 끝도 없는 자기연민 말고는 스스로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치만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재앙을 용서나 이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듯이, 나 역시 그를 용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못하겠다.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지도, 설사 궁색한 이유를 찾더라도 그것으로 이해를 가름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 능력을 과장하지 말자. 그것은 오래 전부터 내 이해 바깥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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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내내 사이가 틀어져 지낸 탓에 나는 그를 잘 모른다. 내 몸과 마음에 털이 나고부터는 그의 말은 대개 무시했다. 툭하면 서로를 의심했다. 경계를 넘으면 으르렁거리고. 다만 나 역시 아버지처럼, 자기연민을 자기 이해의 일부로 차용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그토록 거부하고 싶었는데 닮게 된 것. 그건 외모도 성격도 아니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라는 생각 때문에 절망하게 될 때가 있다.
내가 가진 캄캄함을 성실하게 추궁하거나 들여다보기를 포기하고, 자기 연민으로 손쉽게 벌충하려고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자기 연민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안의 캄캄한 우물을 인정하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좀 어두운 데가 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오래된 우물을 가지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걸. 빛보다는 어둠이 친숙한 걸. 도시는 어둠을 간첩처럼 불길하게 여기고 보이는 족족 몰아내는 데에만 몰두한다.
전에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사람들이 광장에서 열심히 외칠 때 나는 사람들의 명쾌한 목소리가 참 부러웠다. 나도 그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섞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어둠은 승패를 두고 빛과 경쟁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명쾌한 해답 따위는 없다.
전쟁터 같은 집을 뛰쳐나가 강가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저녁이 오고, 강 저편 산 그늘이 물을 건너와 내 위로 가만히 그늘을 내려주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산과 강, 숲, 흙, 어둠과 빛의 경계가 흐려지고, 쏟아질 듯한 황혼이 세상을 덮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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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선형 콘텐츠를 만들고 기획한다. 퐁당은 당분간 밤에 쓸 것 같다. 다크 퐁당 라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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