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연금에 기대서 나도 매일매일 얼마간의 행복을 나눠 받는다. 흔히 고양이를 키우면 측정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고양이들이 주는 행복은 매일 정해져 있는 만큼의 정량을 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기대를 넘어서지도, 혹은 그것을 배반하지도 않는 만큼의 정해진 행복. 다만 매일매일 고양이들에게 똑 같은 시간을, 생활을 할애하지 않으니 정량적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요즘 나는 고양이와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같이 보낸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나서 함께 체중계 위에 올라서면 합산한 무게가, 외출에서 돌아와 고양이를 안고 바로 재었을 때보다 약 3그램 정도 불어나 있다.
일정하다. 고양이가 주는 행복을 무게로 측량하면 3그램이다. 기체인지, 액체인지, 고양이와 내가 어떤 비율로 그것을 나눠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탁구공 정도의 무게에 조금 못 미친다. 매일 고양이와 나는 탁구공 정도의 행복을 주고받는다. 작고 가벼운.
멀리서, 이를테면 하늘 높이 오른 까마귀가 우리를 보면 여러 피스로 채워진 퍼즐처럼 보일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슬픔은 집채만 하고 어떤 기쁨은 탁구공만 하지만, 이를테면 까마귀의 눈에는 엇비슷한 크기의 모자이크에 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까마귀는 우리의 삶을 중재하거나, 이입할 일이 없으니까 저 혼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괘씸하네. 아름답지만 괘씸한 아주, 까마귀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