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 /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볏짐을 날라주고 /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 / 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두라 말하고 /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 추운 여름이면 걱정하며 걷고 /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中
나는 겐지 같은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 같아서, 가까운 약국에서 구충제를 사는 것으로 타협한다. 두 개를 산다. 건너편 편의점에도 들른다. 사또밥을 취급하는 가게는 근방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한 달에 한번 들러 사또밥을 잔뜩 산다. 꾸빵으로, 박스로 주문하면 편하잖아. 글쎄 나에게 사또밥은 드물고 귀하지만, 그걸 실어 나르는 일이 새벽을 달려야 할 만큼 긴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편의점 앞 계단에 앉아 있으니 머리 속으로 수많은 긴급하지 않은 일들이 떠내려 간다. 분명히 샀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책, 다시 자취를 감춘 안경과 새로 주문한 바지와 그 바지를 사느라 내야 될 관부가세를 어림하는 일 같은 것들.
그들이 떠내려 가는 걸 보고 있으니 날이 춥다. 10월이다. 긴 팔을 입어야겠다. 가을 옷을 꺼내는 김에 옷들을 또 정리할 생각이다. 체중이 좀 더 줄면, 날이 서늘해지면, 유행이 돌아오면 입어야지. 옷장 안쪽에 묻어 두면서 계획했던 것과는 반대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옷을 덜어내고 있다.
십 년 아니 이십 년이 넘은, 스테이크처럼 두꺼운, 육포처럼 질긴 청바지들이 대부분이다. 바래고 낡은 청바지들이지만, 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몸을 구겨 넣어본다. 일종의 고별식 같은. 몸을 꽉 물고 있는 이 유행은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서 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세상이 헐거워서 스스로를 강박하고 싶어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