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버려뒀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이전의 삶을 모조리 뿌리치고 너에게 망명한 나를, 너는 꼭 난민처럼 대했어. 살아남기 위해 사랑한 나를, 그걸 어떻게든 기어코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나의 비참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할수록 난민 같은 기분이 드는 나를 너는, 거기까지만 사랑했어. 기꺼이 너의 식민지가 되겠다는 나를, 놓아준다는 핑계로 외면했어. 버렸어. 난민에게 건네는 알량한 구호품처럼 사랑을, 던져줬어. 나를 사랑하는 꼭 그만큼 너는, 나를 모욕했어."
- 드라마 ‘젊음의 덫’ 중에서
벌써 스무 번은 본 드라마인데, 어떤 대사가 귀에 와서 박힌다. 너는 나를, 하고 여배우가 대사를 읽기 시작한 순간, 그 눈은 의심할 여지없이 나를 겨누고 있다. 피고인 앞으로 나오세요. 도망치고 미끄러지던 나를 불러 세운다.
내가 같은 장면에서, 같은 배우가, 같은 대사를 내뱉는 걸 보는 스무 번이나 본 이유, 앞으로도 백 번쯤 보게 될 것 같은 이유. 어떤 경험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약분될 수 없다. 사람들과의 교집합 따위를 없애 버린다. 지금 나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눠지는 메르센 소수다.
너는 나를 버려뒀어, 버렸어, 하고 여배우가 대사를 읊조릴 때마다 나는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숨어 있는 나를 찾아내 푹, 찌른다. 관통한다. 어떤 고통은 풍요롭던 한때를 환기시키고, 어떤 괴로움은 빛나는 한 시절을 소환한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 괴로움을 다시 찾는다. 꺼내 보고 매만진다.
흔히들 좋은 것에는 이유가 없지만, 인과 관계를 특정할 수가 없지만, 괴롭고 아픈 일에는 이유가 있다, 있었다고,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줄 알았어, 아니 불행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의도가 있었다, 의지가 있었다, 불행해지려고 전력투구를 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렇게 보일 때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