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독일 전투기들의 소문난 먹잇감, 이지 *랭커스터(easy Lancaster). 더 많은 폭탄을 실을 수 있도록 기관총은 덜어내고, 장갑은 얇게 설계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밝은 대낮에는 하는 수 없이 격납고에 죽치면서 라디오를 듣거나 잠을 청하고, 밤이면 활주로를 이륙해 독일의 도시들을 향해 날아갔다.
I'll not forget you, sweetheart We'll meet again Don't know where Don't know when But I know we'll meet again some sunny day - Vera lynn ‘We'll Meet Again’ 노래 가사 중
잔뜩 싣고 간 폭탄을 함부르크며, 드레스덴 같은 도시들과 그곳에 살고 있는 수 만, 어쩌면 그 이상의 시민들의 머리 위로 퍼부었다. 잿더미로 만들었다. 전쟁은 죽음에도 피아와 경쟁이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일이지만, 변명의 여지없이, 너무 많은 민간인을 희생시켰다. 랭카스터의 유명세는 그런 점에서 곤혹스러운 데가 있다.
|
|
|
1,000 bomber raid! It takes 50,000 tons of coal to make the bombs alone!
Don’t waste coal (circa 1942) Clive Uptton (English, 1911-2006) |
|
|
당시에는 어서 빨리 폭탄을 아무데나 버리고 돌아가는 게 유일한 목표였지만, 아련한 베라 빈의 노래와는 달리 전투에 투입된 랭카스터는 생환하지 못하는 비율이 높은 기체였다. 기록 상으로는 전쟁에 참가한 7,377대 가운데 3,736대가, 그리고 함께 한 4만여 명의 승무원들이 귀환하지 못했다. 특히 랭카스터 승무원 중에서도 후미 기관총 사수의 실제 생환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돌아보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든 임무였다. 밤이 오고 이륙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기총사수들은 모여서 무슨 원수라도 진 듯 *마틴 밀러를 거푸 마셨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김영승의 시 ‘반성 16’ 전문
여의도 근처에서 한 시민 단체와 협상을 끝마친 참이었다. 상대를 구슬리고 눙치고 읍소하면서 문서에 지뢰가 없는지 체크하고, 문장을 살짝씩 구부려 함정을 판다. 해야 한다, 할 수 있다, 정한다, 범위를 정한다, 증빙한다, 공유한다. 회의를 마치고 악수하고 회사 사람들과 헤어진 뒤 나는 눈에 보이는 작은 위스키 바를 찾았다. 늙은 바텐더가 권하는 대로 한 잔, 두 잔, 세 잔 술을 마셨다. 레몬 조각이 올라간 드라이 진이었다.
아니다. 오이 슬라이스를 곁들인 마틴 밀러였다. 혼자였다. 서서히 모든 것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한 추위, 떨림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했다, 백퍼센트, 모조리, 우회하지 않고 곧장. 영하 50도의 얼어붙은 후미 터렛에서 브라우닝 기관총을 쥐고 있었다. 나는 지금 RAF 제617비행대대 아브로 랭카스터 후미 기관총 사수. |
|
|
뾰족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상쾌한, 살을 에는 듯 추우면서도 따뜻해지는 이상한 감각. 마틴 밀러는 생애를 건너와 용기를 부추긴다. 밤만 되면 지상을 박차고 싶은 기이한 욕구를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술을 연료 삼아 나는 두려움도, 허약한 각오 따위도 다 떼어내 버리고 다만, 더 많은 폭탄을 있는 대로 실어서 이륙했다. 랭카스터처럼 분노를 어디 잔뜩 떨굴 데가 없는지 찾아 헤맸다.
내가 한참 알코올 중독에 시달릴 때 영혼은 대략 그런 상태였다. 사람들과 한참 술을 마시고도 아쉬워서 혼자 한 잔 더 마시는 날이 늘어나고, 외상 술값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지혜로운 바텐더는 마틴 밀러 병에 맑은 소주를 채워서 내놓기 시작했다. 소주와 드라이 진을, 현생과 전생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으로 취한 상태였으니까. 아멘.
* 랭카스터: 영국의 폭격기로 최대 10톤의 폭탄을 실을 수 있어 동시대 폭격기 중 가장 뛰어난 폭장량을 자랑했다. 1942년 봄부터 실전에 참여해 종전 때까지 야간 무차별 폭격 등의 임무를 맡았다.
* 마틴 밀러: 영국에서 증류한 원액을 아이슬랜드로 가져가 청정수와 블렌딩하여 만드는 독특한 프리미엄 진으로, 진 르네상스를 이끈 술로 평가받는다.
|
|
|
fongdang by function fongdang@iwfn.co.kr 서울시 용산구 대사관로 32 02-792-2213 수신거부 Unsubscribe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