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챠 모노가타리
회사는 점차 부실이 늘어나 마침내 계열사를 포함한 자산들을 하나씩 팔기 시작했다.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터라 오너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회사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그녀는 로비 카페테리아의 포카챠에 점점 더 예민해졌다. 집착했다. 프로슈토와 치즈, 루꼴라, 바질 페스토와 토마토의 크기, 재료 올리는 순서, 데우는 시간까지 포카챠 제조 방식에 대해서 하나하나 스태프를 다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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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Life With A Pewter Jug, A Ham On A Pewter Plate, Lemons,
Bread, A Gilt Mounted Roemer And Other Objects On Table Covered In A White Cloth (1627) Franchoys Elaut (Dutch, 1589-1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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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침몰하는 회사에서 허세나 가식을 걷어낸, 정직하거나 노골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그녀가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포카챠까지 맛이 없으면 심리적인 저항선이 무너질 것 같았던 것일까. 덕분에 자본잠식이 심해질수록 포카챠는 점점 더 맛있어졌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한 그루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이런 뜻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또 딱히 아니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서 좀 혼란스러웠던 자본잠식 포카챠 모노가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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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164
키를 처음 측정한 이후로 스스로를 늘 163cm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163에 걸맞은 포부, 기대, 163에 합당한 세계관. 163에게 주어진 삶을 순종하고, 경계를 넘거나 탐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왔다. 그런데 어처구니없지만, 지난 몇 년간 측정할 때마다 키가 164cm를 반복적으로 넘어서거나, 근접한 것으로 기록되어 왔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아 챘다. 뭐지? 초당 500 미터씩 팽창하는 밀키웨이, 우리 은하처럼 경계 바깥이라고 여겼던 곳이 이제 나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내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이 이제 나다. 지금부터 익숙한 기대와 관성에서 벗어나, 164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생은 심술궂다. 보고 싶지 않은데, 세상의 정수리가 보이는 것 같다. 높으니까 외롭다. 이미경 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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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의 목록
집에서 나오는 데 문 앞에 쇼핑백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내일 갈 때 이 쇼핑백 꼭 가져가’ 그녀의 말을 아직 잊지 않은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종이 봉투 안을 확인한다. 깨끗하게 씻었지만 김치 냄새가 가시지 않은 플라스틱 반찬통이 두 개 들어 있다. 아마 J의 어머니가 전해준 김치를 다른 곳에 옮겨 담고, 원래 반찬통을 깨끗이 씻어서 돌려주려는 것이리라. 사무실에 도착해 종이 봉투를 한 구석에 놓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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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Life with Shells and a Chip-Wood Box (late 1620s) Sebastian Stoskopff (French , 1597-1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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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달이 지났지만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찬통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도 있겠다.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차고 넘치지만,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너무 슬퍼하지는 말어. 살다 보면 세상 중요하다고 뽐내던 존재들도 별것 아닌 것들의 목록에 속속 합류하는 법이니까. 반찬통에게 이 말이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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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적 소비자 가격
아침에는 마음을 먹고 집 앞 뽕나무를 점령한 미국 흰불나방 애벌레들을 처치하는 데 열심을 다 했다. 애벌레가 기어 다니거나, 알을 친 가지들을 잘라 내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온통 애벌레와 알 천지다. 하는 수 없이 전지 가위 대신 톱을 가져와 가지들도 모두 베어내니 나무 밑동만 남았다.
두 시간 넘게 뙤약볕에서 가지를 쳐내느라 온 몸이 흠뻑 젖었다. 몸을 씻고 더위도 식힐 겸 저녁으로 평양냉면을 먹어야겠다는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가격이 마음에 걸렸다. 일만 육천 원이라니. 관부가세가 포함된 금액인가. 음식 값이 아니라 벌금일까. 징벌적 소비자 가격이라는 제도가 새롭게 생긴 걸까. 아니 평양냉면이 올해부터 비급여에 해당되어서 전액을 내야 하는, 의료 서비스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면.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럴 수는. 일만 육천 원이라니. 너무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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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 소장님
1975년 준공돼 지금도 버티고 서 있는 태성 아파트에는 젊을 때 이태원을 주름잡던 할아버지가 한 분, 늘 관리실에서 소일거리를 하신다.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주차 다툼을 원만하게 조율하고, 아파트 원주민들의 안부를 살피는 것도 그의 일과다. 늘 짧게 깎아놓은 머리에 다부진 턱, 군더더기 없이 신실한 마음, 아파트는 두 채를 갖고 있다. 80년대에는 강남 한복판 내무장관 옆집을 살다가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아 추방(?)되고, 이태원에서 키우던 가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세상을 호령하는 엔카 가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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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from Theo’s apartment / Vincent van Gogh (Dutch, 1853-1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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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만 세상이 왜 이리 야박할까. 세상은 늘 모질게 달려 드는데 나만 얌전하게 당하란 말인가. 분노가 그의 심장을 쥐어 짜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짜부라진 심장을 부여잡고 찾아간 응급실에서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마침내 마음을 삼켰을 때, 사경을 헤매는 병원 침대에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찬송가를 들었다네. 종소리가 들렸다네.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눈물이 흘렀다. 미워하던 사람들을 마음에서 다 놓아주게 되었다네. 굳세고 신실한 마음이 그를 이끌었다. 한 번은 음료수를 몇 개 들고 관리실을 찾았는데 모르는 분이 앉아 계시길래 짧게나마 이곳에 이야기를 적습니다. 평안하세요, 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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