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우느냐고요? 내가 열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남자와 어머니가 결혼했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20년 전에 보기 흉한 드레스를 – 남에게 물려받은 옷을 입고 파티에 갔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기억이 안 나는 어떤 무정했던 일 때문에 – 우는 거예요. 피곤하기 때문에 – 피곤하고 잠이 안 오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_ 존 치버 ‘이혼의 계절’ 중
안타깝지만 호사가들에게 존 치버는 좋은 소재다. 괜히 일기를 남겨 가지고. 이해는 한다만, 그 자녀들이 존 치버의 일기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면 화근. 존 치버의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존의 애인(남성), 아내 메리의 애인(남성)과 같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불화로 점철된 결혼 생활이 다시 화제가 되었다. 메리는 소설을 빌미로 자신의 언행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존에게 진절머리를 냈다는 둥, 어쩌구 저쩌구.
일견 머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블루스를 들으면서 왜 이렇게 음악이 늘어지냐고 타박하면 바보처럼, 메리를 본뜬 키릭터가 유독 염세적이라는 평가도 뭘 모르는 소리다. 그의 작품에는 거의 모든 캐릭터가 하염없는 일상의 괴로움을 견디는 데 생애를 바치니까.
절망이나 괴로움이라 할지라도 프리즘을 통과해 다채로운 양상을 드러내고, 변주되는 게 치버 작품들의 매력이니까. 치버를 읽는 건 그 점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호사가들의 분석이란 자꾸 흘러내리는 바지 같다. 헐겁다.
어쩌겠는가. 내가 내 삶을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조차도 삶의 일부이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조금은 더 나에게도, 남에게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으니, 됐다, 괜찮다. 치버가 속삭인다.
존 치버를 읽다 말고 운다. 왜 우냐면 갓 스물이 되었을 때, 엄마가 춘천서 열린 간호 조무사 국가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 때문에, 뒤 늦은 기쁨 때문에, 서울대학교 뱃지 달고 마당에 들어서면 의젓하던 작은 삼촌이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작은 삼촌이 죽고 부터 교회를 멀리한 아버지의 절망을 대신해서, 영월 집으로 가자던 외할머니의 외로움을 대신해서 운다.
아버지와 어머니, 당신들의 또 어머니와 아버지를 흔들던 기쁨과 괴로움, 집착과 절망. 나의 비좁은 한 생애 안에 가둬 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몰려와서, 나를 타넘는다.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이야기들, 어쩌면 아직 내 것이 아닌 감정들을 나는 순순히 받아 적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얼마전 저녁에 은교네 부부랑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과일 깎아 먹고, 또 창조 감독님이 실어 날라준 횟감이 있어서 그거 나누어 먹고 헤어질 때 은교씨가 울어줘서 고마웠다. 나를 대신해 누가 울어준다는 생각은 그 전까지 못해봤다.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이야기가 한참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