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움직이려면 간단치 않은 루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지구 자전축이 뒤틀어지고, 계절이 바뀌고, 계절에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계절에 대항할 수 있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도 시간이 남는 이유는 누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 녹색 바지 입으신 분. 저요? 네네 파란색 점퍼 입으신 분이요.
그 누군가가 나다. 나는 왜 하필 파란색 점퍼에 녹색 바지를 입었을까? 골목으로 빠져나와서 담배를 먼저 한 대 피우고, 물을 마신다. 미팅하느라 받지 못한 전화와 메시지들을 다독거린다.
누군가 나를 사랑할 때,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는, 어디가 중간 지점이 될지 애써 가늠할 필요가 없다. 오늘의 중간 지점은, 도대체, 어디야? 역삼역도 지났는데? 내가 지나쳤나? 닛산? 위 워크? 어디라고?
중간 지점을 찾아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여기는 그냥 선릉역인데요? 선릉역이잖아? 어째서인지 강남역과 선릉역의 중간은 선릉역에서 멀지 않다. 선릉역에서 약 스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다.
지갑 찾았어! 지갑 찾았어? 지갑 찾았어! 어디 있었는데? 주머니에 있었어. 주머니에 있었어? 여기 가운데 주머니에 있었어. 지갑이 발굴되면서, 강남역과 선릉역의 중간은 선릉역 근처에 있다는 지정학적 발견은 금세 잊혀진다. 하하하.
서른 살 무렵에 나는 선릉역 근처 사무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오니 이상한 적의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고 다녔는데, 손잡이가 없는 칼처럼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일도 많았다. 지구 자전축은 꼿꼿하게 똑바로 서 있었고,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몰랐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기 전까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덕분에 요즘은 기쁜 소식이 적지 않다. 얼마 전에는 겨울 코트 안주머니에서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스티브 잡스 안경을 찾아냈다. 아내가 큰 마음 먹고 사준, 스티브 잡스 안경을 찾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잃어버린 안경의 값어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제 와서 스티브에게 다른 안경을 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안경도 찾고, 지갑도 멀쩡하게 되돌아왔고,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데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럼 됐어. 오늘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배고프다. 나도 배고파. 점심도 못먹었어.
못먹었어? 얼른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