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20대 초반을 어영부영 지나 보내고 20대 중반이 지나서야 연애를 하게 됐다. 그는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출신 학과의 조교로 일할 때 만난 사람이었다. 사업을 말아먹고 원치 않던 사무직에 종사하게 되어 무언가 기분을 환기할 수 있을만한 취미를 갖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운명처럼 학교 내 게시판에 <디제이를 배워보고 싶으신 분>을 모집하는 글을 보게 됐다. 에미넴과 50CENT, 블랙 아이드 피스에 빠져 매 주 금요일과 토요일은 홍대와 이태원에서 살 때였기에 나는 당장 모집에 지원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디제이 선생은 일렉트로닉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을 주로 플레이하는 분이었고 같은 학교의 컴퓨터 공학과에 재학 중인 나와 동갑인 남자 사람이었다. 장르의 다름 정도는 그 당시 나의 열정을 꺾지 못했고 나는 주에 2회 이상 그 남자 사람의 자취방에서 디제이로서 갖추어야 할 플레잉 방법을 배우게 됐다.
그는 퍽 다정했고 어쩌다 보니 디제잉 연습 때뿐 아니라 밖에서도 커피를 마신다거나 술을 함께 마시는 사이가 됐다. 그가 디제잉 스쿨을 야매로 연 데는 심심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여러 번 휴학을 반복하는 사이 학교에 동기들은 남아 있지 않았고 주말에만 바쁜 직업의 특성 상 평일을 즐겁게 보낼 방법이 필요했던 거 같다. 아무튼 스승과 제자에서 친구와 비슷한 사이가 됐을 때 그의 제안으로 컴공과와 우리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간의 술자리를 만들게 됐다. 나는 조교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학과 출신자였기에 여전히 가까운 후배들이 꽤 있었고, 일을 하면서 새롭게 친해진 후배들도 있었기에 술자리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디제이 스승에게 조금씩 친구 이상의 감정이 생겨나던 중이었기에 그의 제안은 꽤 반가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디제이 스승과 내가 연애를 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나는 이 디제이 스승이 술자리에 데리고 나온 그의 학과 후배와 어쩌다 보니 얽히게 되어 얼렁뚱땅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주변인들에게 받았던 연애 조언으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질투 작전을 펼치려다가 그의 학과 후배와 연애를 하게 됐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의 첫 번째 제대로 된 연애 상대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아무래도 분량이 너무 길어질 듯 하고... 아무튼 그 또한 그 당시 꽤 복잡한 입장이었다. 나보다 4살이 어렸던 그는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동기들보다 한 학기 정도 늦어진 군 입대에 다양한 압박감을 느끼던 그는 나와의 연애를 일탈의 무언가로 삼고 싶었던 듯한데... 우리 둘 다 예상치 못하게 이 관계가 꽤 진지해져버렸다는 것이 변수로 작용했다.
군대에 가기 전의 만남보다 군대에 간 이후의 만남이 더욱 길었기에 나는 그의 공백이 예상보다 컸음에 꽤 당황했다. 또 타인과 관계 맺기에 유독 서툴고 나의 기분이나 마음에 대해 상대에게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기에 하고 싶었던 말보다 아무 말이나 혹은 미운 말들을 더욱 많이 하게 됐다. 그도 처음 겪어보는 폐쇄적인 환경과 자유의 제한에 많이 당혹스러웠을 텐데 나는 그의 감정들보다도 나의 외로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어왔을 때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것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고민되면서도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인 것 같아서.
그와의 관계에서 내가 배운 것은 나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남편과 연애를 할 때 최대한 솔직하게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남편에게도 그러하기를 요구했다. 오히려 결혼 후에 내가 너무 치졸해지는 것 같아서 표현하지 못했던 몇 몇 감정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남편은 다정하고도 단단하게 나의 기분을 마주하게 도와준다. 건강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나는 이 사람에게 배웠다.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감정을 교류하는데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를 이 사람을 만나며 정립해나가고 있다.
tmi_ 디제이 스승은 디제이로 잘 나가는 친구가 되어 클럽씬에서 한때 꽤나 비싼 몸값을 자랑했다. 스스로 자랑을 너무 많이 해서 재수 없었다. 관계를 맺는 것뿐 아니라 손절에도 타이밍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