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생을 존중하지 않는다거나 방관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년이 되고 나니 체중은 좀 불었지만, 자아가 좀 슬림해졌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좀 더 젊었을 때에는 비대한 자아 때문에 관계에 거리를 만들려면 상대를 밀어내야 했는데, 비좁아서 다투고 숨막혀서 호흡이 거칠었는데, 그냥 자아가 슬림하니 저절로 거리가 확보된다. 자아가 슬림해지니 모든 일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고 서사를 엮어내는 편집증적인 성향도 줄어들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의 인생이 얼마든지 우발적이고, 한 숟가락의 의미도 찾을 수 없으며, 앞뒤 맥락이나 그럴 듯한 인과 관계도 그저 우연한 나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한 집착이 줄었다고 해서 애정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 무게가 줄어들거나 갑자가 삶이 고요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겠는가.
다만 세상 분명해 보이던 이분법과 경계가 없어진다고 할까. 우발적이고, 우연한, 한 때의 해프닝과 세상 너무나 중요하고 심각한 사건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얇고 찢어지기 쉬운 종이가 한 장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대와 달리 인생의 희극과 비극을 가르는 것이 무슨 뚜렷한 이유나 필사적인 의도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
지난 해인가 은퇴한 투수 봉중근이 술을 먹고, 집 근처에서 전동킥보드를 타다가 넘어져서 운전면허가 취소됐다. 한참을 웃었다. 와하하하하. 술김에 그냥 갑자기 전동킥보드를 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배우는 음주운전하고 공공기물을 들이받아 요 며칠 계속 대서특필되고 있다. 당분간은 본업으로 되돌아오기 힘들 것 같다.
물론 뭐 음주 운전을 하면 안된다. 아직도 그런 일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분들이 엄연히 존재하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한 투수 봉중근과 모 배우 사이, 희극과 비극을 가르는 어떤 분명한 차이가 있을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전에는 결과가 나쁘면 그 일에 참여한 사람의 태도와 때로는 삶의 이력까지 모조리 싸잡아 비판할 때가 있었는데, 그건 내가 그냥 결과에 집착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은 되돌아가서 그저 운이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만 너무 빨리 판단하고, 계획하고, 빨리 포기하거나 철회한다. 제발 빨리 성취하고, 빨리 실패하기 위해서 안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두르면 그냥 빨리 늙게 될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