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상태는 어떤지, 아기 엄마가 되는 기분은 어떤지 여러 가지를 궁금해하던 친구는 끝으로 언젠가 자기도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말을 카드에 적었다.
부처님처럼 귓 볼이 크고, 두터워 틀림없이 부자가 되리라 확신했던 그 친구는 그 후로부터 몇 년 뒤 뇌출혈로 쓰러졌다. 미국에서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건 6년 전, 수술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즐겁게 수다를 떤 건 4년전. 괜찮다기에 정말 괜찮은 줄 알고 '코로나 잠잠해지면 보자'는 매번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다 결국 진통제에 취해 자꾸 잠이 드는 친구만 두 번을 봤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결국 장례식장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는 생활 곳곳에서 불쑥불쑥 나를 찾았다. 예컨대 찬장의 양념통이나 냉장고에 붙어 있는 레고 자석 등이 그렇다. 이것들은 모두 그 애가 뉴욕에서 보내온 선물들이다.
초록색 카드는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함을 열어보다 발견했다. 친구가 직접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카드라고 생각하니 잉크의 번짐이나 사소한 점 같은 것에도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데, 잘 지내고 있지?란 글자 뒤에 씨익 웃고 있는 스마일 그림이 늘 마음에 위안과 평화를 준다.
사실 모니터 앞에서 많은 상처와 서늘함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업무상 카톡 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고, 이런 저런 요청을 뿌려 놓은 메일에 언제쯤 확답이 올까 늘 전전긍긍이다. 하루하루 날짜는 지나가는데, 진전된 일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느라 엄마, 아내 노릇은 뒷전이라는 미안함이 밀려올 때, 써둔 원고가 별로라는 자각이 들 때, 걸핏하면 체하는 몸 상태가 걱정이 될 때 그때마다 카드를 펼쳐 스마일을 찾게 되니 나는 친구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는 걸까.
그 작은 스마일을 볼 때마다 다 괜찮다고, 지나간다고, 걱정 말라고 격려하던 친구의 푸근한 얼굴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처음엔 이 순간마다 울었는데,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혼잣말처럼 이런저런 말도 걸어본다. 그렇게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아픈 순간을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나는 한 뼘 더 큰 어른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친구와 내가 붙어 다녔던 시간은 고작해야 고3때 1년 남짓이지만, 평생을 두고 이런 식의 잔잔한 위로와 가르침을 받게 될 거라 생각하니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멀리 떨어진 그 곳에서 지금쯤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유독 심성이 고운 그 친구는 어쩐지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빌며 부처님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