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것이며, 끊임없이 알력을 주고받는 영역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윌리엄 애커만의 음악처럼 고요를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큰 각오가 결기가 필요한지 안다. 알게 되니까 비난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의 적대적 감정은 무지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 무지는 지식이 아닌 이해의 영역이라는 것도.
요즘도 매일매일 숙명과 같은 콘텐츠 마감에 시달리다 보니 강박과 조급증을 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도 여전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활 때문에 어쩌면 지금도 나는 느리거나, 느긋한 태도들에 적대적인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커만의 ‘순결한 영혼의 임박한 죽음’이라는 음악은 임박한 죽음 때문에 초조 불안하거나 이를 피하기 위해 긴박한 것이 아니라, 임박할수록, 임박했기에 더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음악 같다.
명상처럼 조용한 윌리엄 애커맨의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가 마치 누군가를 아아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약속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지만, 나는 약속 장소에 지나치게 빨리 도착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 내가 기다리는 사람을 무척 보고 싶어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기다림도 즐겁고 설레니까 나는 아마 서둘러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이겠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면서, 커피를 리필해 마시면서 기다리게 만든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려본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다리는 일에 시간을 거의 전혀 할애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요즘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이라고는 버스 정류장에서 405번을 기다리는 일뿐.
애커만의 음악을 찾아 듣는 일도 버스를 기다릴 때에나 가능하다. 버스는 쓸데없이 멀리 돌아서 그토록 많은 정류장을 거르는 법도 없이, 느리게 집으로, 사무실로 나를 데려간다. 마음의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