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역시 그렇다. 수습시절 제때 선배의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샤워할 때도 지퍼 백에 핸드폰을 넣어둔 동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노트북을 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소개팅 도중에도 노트북을 꺼내서 기사를 수정하는 건 에피소드 축에도 끼지 못한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에도 사고는 발생했고 한국의 자정께 날이 밝은 워싱턴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굵직한 소식들이 보도됐다. 그럴 때면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전화를 몇 통이고 돌려야 했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내내 전력 질주만 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일정 시기가 지나면 다들 아팠다. 기사 잘 쓰기로 유명한 선배도 취재력이 탁월했던 선배도 탄성을 자아내는 제목을 뽑아내기로 유명한 선배도 이 일을 20여 년 하다 보니 어딘가 아팠다. 수술, 휴직, 혹은 생각지 못한 사고들. 지구력으로 버텨도 한계가 오는 시간이 찾아오는 거 같았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프로처럼 일하고 있나. 아니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뉴스를 쫓아야 하는 삶이 버는 만큼‘만’ 일하는 프로일 수는 없었다.
워라밸, 일과 삶의 균형. 숨 고를 시간과 몰입할 시간의 조절은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중간을 찾아가는 건 참 쉽지 않았다. 일에 매몰되다 보면 개인의 삶은 희미해졌고, 나만의 일상을 챙기다 보면 아차 하는 순간 무능한 사람이 되는 거 같았다.
어설픈 답을 찾은 건 운전을 하면서다. 면허증을 따고 바로 연수를 받았을 때, 30여 년 무사고 경력을 자랑하던 선생님이 내내 강조했던 제1기본 원칙은 ‘차선 지키기’ 였다. 내가 달리는 길의 차선을 잘 지키면 큰 사고는 피할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차선의 중심을 엄격히 지키려다 왼쪽으로 치우치거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선생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완벽한 중간은 없다. 너무 중심을 잡으려다보면 오히려 다른 것을 못 볼 수 있으니 조금 왼쪽으로 기울어져도 가끔 오른쪽으로 치우쳐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니 대충 가운데를 찾아가라고 했다. 다만 사이드미러로 내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별거 아닌 거 같은 그 말은 운전뿐 아니라 일상을 버틸 때도 힘이 됐다. 그래, 완벽한 중간은 없다, 온전한 균형 잡기는 쉽지 않다. 완벽하려 한 걸음도 떼지 못하기 보다는 조금은 대충 다만 내가 어느 즈음에 와 있나 주위를 살펴보며 살자, 그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일과 삶의 균형도 마찬가지 아니려나. 물론 차와 다르게 삶의 사이드미러는 없다. 그래서 좀 더 내 하루를 살펴보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며 누군가 먼저 간 길을 유심히 바라본다. 숨을 고르고 내뱉는 시간, 충분히 비워내야 채울 수 있는 당연한 균형점은 알아서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어느 순간 짠하고 깨달아지는 게 아니니까. 휴게소에 들러 가볍게 커피 한 잔 하고 졸음 쉼터에서 눈도 잠깐 붙이면서 살펴야 했다. 명확한 지도나 내비게이션 없는 일상 역시 그렇게 찬찬히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