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낡았지만 멋스러운 (단단한 마루와 노출 콘크리트가 매력적인)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소개받았는데, 그리니치 빌리지를 내려다보는 시원한 조망에 전보다 넓어진 면적인데도 가격은 1,950달러였다. 벽장 하나 하나를 열어 보이며 그랜드캐년 투어 가이드처럼 열띤 설명을 하던 중개업자가 “그런데 화장실에서 뭔가 눈치채셨나요?”라고 말을 꺼내기 전까지 루디 씨는 이미 계약하기로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응? 화장실에 거품 욕조라도 있나? “변기가 없답니다.”
‘변기가 정말 필요할까?’란 제목의 이 칼럼의 필자는 고민 끝에 결국 이 집을 얻지 못했고, 다른 집을 구할 땐 토를 달거나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집 안에 화장실과 변기가 들어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루이 14세 시절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한 정원 구석구석을 이용했고, 영국에서 화장실을 뜻하는 ‘loo’는 2층 창 밖으로 오물을 버릴 때 행인에게 주의하라고 외치던 말 ‘gardyloo!’(물 조심!)에서 왔다. 1980년대 언덕 중턱에 있던 우리집 변소엔 가끔 “똥푸처”라고 외치는 아저씨들이 국자 같은 걸로 양동이에 똥물을 퍼담아 지게를 지고 언덕을 다시 내려가곤 했다. 아저씨들이 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았는데, 그 흔적의 규칙성에서 헨젤과 그레텔 남매의 빵조각을 떠올리곤 했다. (미안해요, 그림 형제.)
“우리는 채광이 좋고, 지금 사는 집보다 넓고, 거실이 시원하게 트인 파리 시내 집을 찾아 나섰다.”
10대 후반에 떠난 어학 연수를 시작으로 20년 넘게 파리에 살고 있는 곽미성 씨도 그즈음 이사를 결심했다. 파리의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로또에 담첨되면’ 파리에 집을 가질 수 있다고 농담하는 게 유행일 때였다.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북향 집, 차이나타운 식당가 한가운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구간이었던 집도 예산이 빠듯했다. 그러다 서쪽으로 에펠탑 전체가, 동쪽으로 몽마르트 언덕 위의 사크레쾨르성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집을 발견. 조건에 비해 좀 싼 가격은 외곽순환도로에 면한 위치 때문에 소음과 매연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이라면 소음과 매연은 자연환경에 가깝지 않나요? 소음이라면 층간 소음이 더 문제요, 매연은 곧 도래할 전기차 시대를 기대하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면 첫 단계로 집주인에게 지원서를 써야 한다. “당신의 집을 방문하고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방 하나는 작업실로 꾸며 글을 쓰고, 커다란 거실 겸 주방에서는 요리를 즐기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후회 없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다른 후보자들의 지원서와 함께) 검토한 집주인의 승인이 나면 3개월간의 대출 심사를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집값의 7%가 부동산 중개료로 들어간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후배가 내민 청첩장에는 나태주를 인용한 정밀아의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다. 그런 문장을 보면 아저씨답게 김춘수의 꽃을 이야기해 주어야겠지. 옥수동에서 전세 살던 후배는 용인에 신혼집을 구했다고 말했다. 용인으로 가는 이유는 있었다. 네 집은 내 집이 아니기 때문에. 내 집 마련을 미루지 않으려면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했다.
참고>
- Do I Really Need a Toilet? by Stephen Ruddy (The New York Times)
- 다른 삶, 곽미성 (어떤책)
- 결혼합니다, 김두완과 김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