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B나 C가 간간이 단톡방에 운을 띄워 근황을 묻기에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아마 A와의 관계는 끊어지기가 쉬웠을 것이다. 몇 번 ‘넌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이 바빴거나, 깜빡했거나였다. 물론 나 역시 바쁘거나 깜빡하면 오는 연락을 놓치곤 한다. 그래도 아차! 할 때 다시 연락해 용건을 묻는 게 상식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유독 나에게만, 정확히는 우리에게만 선택적으로 바쁘거나 깜빡하면서도 위로가 필요하거나 자랑할 ‘거리’가 생긴 순간만큼은 또 재깍재깍 연락이 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친구 A가 가진 ‘진심의 함량’을 자꾸 계산해 보게 된다.
곧잘 ‘저울질’이 일어나는 또 다른 상황은 ‘베풀기’다. 일단 내가 먼저 베풀어 본 뒤 그이로부터 어떤 반응이 오는지를 본다. 최소 두 번 이상 밥을 샀는데도 커피 한 잔이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나대로 그이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물론 이 선은 캔 커피 하나에 바로 지워지기도 한다) 가만히나 있으면 그래도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서 그랬겠지’ 하는 이해의 여지가 생기는데, 늘 얻어먹기만 하고 입을 싹 닫는 치중엔 자기 치장이며, 잘 보이고 싶은 누군가에게만 아낌없이 돈을 쏟는 부류가 꽤 많아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이러저러한 계산은 역으로도 잘 일어난다. ‘내가 그러하듯 남들 역시 그러하다’는 마음이 저 이를 섭섭하게 하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하나하나 신경을 쓰다 보니 주위로부터 세심하다거나 다정하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서 생각을 해보면 나의 이런 시시콜콜한 계산이 방어기제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든다. 나는 내 멋대로 애정을 듬뿍 쏟아 놓고 상대가 내 기대보다 못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상처받고 실망한 적이 많았다. 그런 설익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름대로의 살길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는다’와 비슷한 귀결이었다.
‘딱 저 이가 주는 관심만큼만, 딱 저 이가 나를 대하는 온도 정도만’을 염두에 두면서 관계의 수평을 딱딱 맞추려 노력했던 것이다. 내 애정의 키가 조금 더 컸다 싶으면 여지없이 싹둑 잘랐고, 저쪽에서 보내오는 애정이 조금 더 크다 싶으면 크게 반색하며 그이를 한 번 더 챙기는 식이었다. 관계에서 손해보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는 그렇게 좁쌀스럽고 유아틱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옹졸함이 결국 자기 연민이나 열등감에서 비롯됐으리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이고, 나는 할머니가 돼서도 경로당 친구들 틈바구니 속에서 어느 날은 꽁하고, 어느 날은 명랑할 것이라는 것.
‘좋은 관계’란 늘 어렵고 모호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