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어린 막냇동생을 껴안고 잠이 들었고, 내내 방에 처박혀 두려움에 떨던 나와 동생은 상의 끝에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든 아빠에게 우리의 이불을 덮어주기로 했다. 양복 차림 그대로 잠이 든 아빠는 우리가 슬며시 덮어준 이불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들지 못한 탓인지 어둠 속에서 이내 “아유 우리 딸들 진짜 착하다. 고마워. 그리고 아빠가 미안해”란 세상 다정한 치레(?)를 하셨는데, 과장된 말투며 몸짓이 어찌나 어색한지 어린 마음에도 평소답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찌됐든 한결 풀린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내일이면 엄마랑 화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으로 잠이 들었다. 만일 두 분이 내일도 저렇게 싸운다면? 동생과 내가 매일 방에 숨어 귀를 막고 있어야 한다면? 엄마 아빠가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동안, 나와 동생은 숨죽여 울며 이런 불안감을 키웠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의 기억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날 엄마의 차림새며 아빠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여전하다. 왜 그렇게 생생한가 생각하면 여러 번 복기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선다. 그날의 충격이 너무 커서 나는 노력하지 않고도 한번씩 두고두고 그 날을 떠올리며 곱씹게 됐는데 그러는 동안 10살도 됐고 스무살도 됐고 서른 살도 됐다.
신기한 건 기억하는 상황이며 정황은 똑같은데 떠올려지는 시점마다 그 일을 다른 관점에서 다른 맛으로 음미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어릴 땐 그저 ‘엄마 아빠의 싸움’이던 단편적인 사실이 애 낳고 지지고 볶으며 사는 지금에 와서는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당시 30대 중후반이었던 부모님의 나이를 헤아리며 얼마나 너덜너덜하고 지긋지긋한 일들이 삶 군데군데 많았을까? 싶은 연민도 든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특정한 경험, 사건이 잊혀지지 않아 한번씩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의미를 곱씹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언제부턴가 애들이 애들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순간은 지나가지만, 기억은 오래가기 때문에 어른이 되는 과정 틈틈이, 조근조근 그때의 의미를 곱씹게 될 까봐 조금은 두렵다. 나 역시 우리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고 지내는 엄마의 친구가 나를 떠 보기 위해 “너희 아빠 어느 대학 나왔어”하고 묻던 그 얼굴의 표정과 말투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
아빠는 고졸이었고, 그 점을 모를 리 없는 아줌마였지만 명문대를 졸업한 아줌마 남편의 졸업앨범을 구경하고 있던 10살의 나에게 얄궂게도, 아주 은밀히 그런 질문을 했었더랬다. 10살의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15살쯤의 어느 날에는 아줌마의 속내를 어렴풋하게 읽었고, 20살 겨울 무렵에는 완전히 확신했다.
그런 식으로 어린 시절 엄청 대단해 보이던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는지, 단순해 보이던 그 질문 속에 얼마나 많은 캐냄과 떠보기가 있었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 없고 지루했던 그 사람이 얼마나 단단한 사람이었는지 너무 선명히 깨달아지는 경험을 하고 보니 애들이 마냥 애들로만 보이지 않는다. 당장은 내 자식부터가 그렇다. 지금은 세상 전부인 엄마지만, 언젠가는 성인이 성인을, 여자가 여자를 가늠하듯 나를 생각해 보는 날이 오겠지 싶어 스스로 많이 검열해 보는 요즘이다.
훗날 딸 아이는 상처가 여전한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엄마 아빠에 대해 어떤 식의 해석을 덧붙여갈까? 머리 굵은 자식만큼 어려운 대상이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