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가 그녀에 대한 생각을, 걱정을 얼마나 오랫동안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지, 우리가 얼마나 튼튼하고 집요한지는 별 상관이 없다. 우리는 곧 다가올 현실들을 자주 입 밖에 내놓으며 준비가 되어있는 양 굴지만, 엄마의 상태가 시시각각 변할 때마다 새롭게 무너지는 일을 막을 수가 없다. 매일 몇 센티 미터씩 야금야금 밀려나는 기분이다. 게으르고 거대하고 느릿느릿한 불도저를 맨 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느낌이다. 차라리 그 압도적인 힘으로 나나 가족들을 찍어 눌렀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이 불도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움직이고, 우리를 난간이 있는 곳까지 손쉽게 밀어붙인다.
다만 모조리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와중에도 난생 처음 엄마랑 목적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은 완전히 새롭고, 좋다. 가까운 일들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먼 곳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알츠하이머 특유의 증상을 때로 배알도 없이, 사랑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국민학교 1,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손에 이끌려 경찰서 방송실에서 저녁마다 노래를 부르면 높고 커다란 스피커로 자신의 노래가 영월 시내를 울리던 이야기, 간호 조무사로 시험을 치러서 춘천 모 학교 커다란 알림판에 차석으로 이름을 올렸던 소식이 여전히 씩씩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엄마의 삶을 알면 알수록 그녀는 삶을 통틀어 지금 한때의 절망에 삼켜질 만큼 나약하지도, 동정이나 연민에 기댈 만큼 물렀던 적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아프니까, 그녀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조금 더 그 사실을 빨리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엄마의 병이 슬프고 가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에 지지 말라고 엄마가 나한테 매일 말을 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러 중학생 때 이후 처음으로 매주 엄마를 만나러 영월을 내려간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만나는 싸움은 보다 젊었을 때와는 다른 자세를 요구한다. 극복이나 승패 같은 단어는 힘이 없고,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되 그것을 이유로 포기하거나 물러서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패배가 예정돼 있더라도 쉽게 질 수는 없다. 적어도 그녀는 아직 질 생각이 없다. 그녀가 지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손을 들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