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천천히 그러나 나쁘게 튀었다. 내 감정을 억압하며 모든 타인을 긍정하자, 나를 만만히 여기는 사람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나를 누군가 함부로 대하리란 생각을 못했다.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생의 추상적 진리를 믿기 때문이었다. 노력하는 자에게 영광이! 노력만을 믿느라 노력에도 종류가 많고, 어떤 노력은 틀린 결과를 불러온다는 걸 고려하지 못했다.
착각의 대가로 인생 최악의 착취자들을 연달아 만났다. 나쁜 사장, 나쁜 친구, 나쁜 애인, 나쁜, 나쁜, 나쁜.......그들은 빈집털이처럼 나의 이해와 관용, 존경심, 자존감들을 전부 훔쳐갔다. 슬플 때 다그치고 기쁠 때 깎아내리는 식으로 왜곡된 나의 현실인식을 한번 더 비틀었다. 나는 그들과의 마찰이 당황스러워 계속 반성하고 사과했다. "미안하다, 생각이 짧았다"는 말을 그렇게나 많이 하는데도 과열되는 내 잘못들을 믿기 힘들었다.
너무나 유감스러운 사건들 덕분에 거지 같은 인생개혁프로젝트를 한 큐에 끝낼 수는 있었다. 나와 별개로 각기 추악한 인간군상들을 보며, 악인들에겐 잘 해봤자라는 통찰을 얻은 것이다. 물론 시간은 좀 걸렸다. 당시엔 못 견디겠다는 생각으로만 버텨지는 1분 1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매 순간 억울했고, 남이 만든 악몽에 사로잡힌 내 처지가 엿 같았다. 그래도 길몽과 악몽을 두루 탐닉하며 몽상의 양면적 속성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생각들은 환상이라는 인지가 확실하지만, 나쁜 생각은 정반대라는 거였다. 악몽들은 ‘언젠간 끝날 것’이란 감각을 마비시키며 지독한 현실감을 흉내냈다.
하지만 불굴의 ADHD 용사는 절망을 오래 갖고 놀 수 없는 법이었다. 당시엔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은희경, 『새의 선물』)>는 구절에 큰 위로를 받았다.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타인의 악의에 악의로만 맞서고 싶은 격정을 타이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내가 매일 하는 생각의 주체는 ‘저 사람’, 즉 남이었다. 하지만 ‘삶이 내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저 사람을 보냈을까?’ 생각하면 주인공은 다시 내가 되었다. 내 인생의 조연들이 오로지 장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삶이 하는 말들을 빨리 알아듣고 싶어졌다. 한 번에 못 알아들으면 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될까 두려웠다. 삶은 지루하고 압도적인 호랑이 선생님이니까, 내가 훌륭해질 때까지 불행을 가장한 가르침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삶의 속내를 짐작하는 과정에서, 복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진실로 하고 싶은 복수들은 죄다 범법이어서 이룰 수 없었고, 이루지 않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타인을 죽이지 않으며 제거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내 생각엔 그저 잊는 것 뿐이었다. 망각을 용서의 개념으로 두면 해주기 싫기 때문에 두 가지를 분리했다.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면서 다 잊었다.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기에 더 열심히 잊어버렸다. ADHD는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잘 잊기 때문에 잊고 싶은 것 쯤이야 우습게 잊을 수 있다고 믿었다. ADHD 기질 덕에 많은 붓기와 콧물과 티슈 낭비를 예방할 수 있었으니 약간의 덕을 본 셈이다.
최후의 내가 천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난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잊었다 생각한 것들에 불시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혹은 “생각할수록 열 받아.” 연쇄적 데굴데굴 분노로, 여름에도 냉동고에 갇힌 듯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땐 내 삶보다 내게 상처준 사람들의 삶을 믿었다. 그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망쳐나갈 세월과 사건들을 기대했다. 망하라고 생각하고 망하는데 힘을 보태지는 않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게서 200ml 이상의 눈물을 짜낸 사람들이 장수하길 바란다. 그런 인간성으로 오래 사는 게 과연 축복일까 싶은 것이다.
몇 번의 자아 폭발을 겪은 후, 푸른 장미나 샤인머스캣이 되자는 다짐은 완전히 박살나게 되었다. 꽃이나 포도를 설계하는 것처럼 나를 고칠 수는 없었다. 나는 조작 같은 방식으로 수정될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 때문에 획기적으로 좆되었던 나는 이제 인생 개혁에 목 매지 않는다. 어쩌면 삶이 내게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 아닐까 싶다. 길길이 뛰거나 실실 웃거나, 빌빌거리며 낭비한 순간들이 결국 하나의 결론을 조명한다.
아름답지 못한 특징들이 전부 죄인 것은 아니라고, 죄인처럼 살고 싶을 때마다 죄의식과 싸우라고. 자신을 버리게 만드는 타인들을 버려야 자신으로 살 수 있다고 말이다.